배호남의 예수전
1. 나
내 이름은 배호남이다. 하늘 호[昊]에 사내 남[男]을 쓴다. 내 이름은 기독교적이다. 하늘에서 내려주신 아들. 아버지는 내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내 할아버지는 목사였다. 그는 한국전쟁 때 인민재판에서 순교했다. 내 집안은 기독교 순교자 집안이다. 당연하게도 집안 어른들
중에는 집사, 권사, 장로가 여러 명이다. 둘째 작은 아버지는 가업(?)을 이어받아 목사이다. 중학교 무렵까지, 나는 3대째
가업을 이어 받을 기대주였다. 그리고 내 스스로 그걸 원하기도 했다. 열다섯 살 무렵까지 나는 목회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런데 고교로 진학하면서, 나는 목회자의 꿈을 접고, 나아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버렸다. 그 과정에는 둘째 작은 아버지가 겪었던
고난이 내게 준 영향이 컸다.
둘째 작은 아버지는 해방신학 계열의 목사였다. 목사 안수 후 십 년 가까이 개척 교회를 옮겨 다녔다. 그러다가 88년, 전남
무안군의 한 교회의 담임 목사직을 맡게 되었다. 교인 수가 500명이 넘는 꽤 큰 교회였다. 그것은 일종의 영전이기보다는, 그가
노력한 10년 세월의 당연한 결과라고 나는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그 교회의 목사직을 오래 맡지
못했다. 작은 아버지의 설교는 종종 너무 진보적이었으며, 청년부의 젊은 신도들과 시국 토론을 즐겼고, 때때로 그들과 함께 술도
한 두 잔 씩 했던 것이다. 결국 보수적인 장로들과 집사들의 결의로 그는 교회에서 쫓겨났다. 교회에서 쫓겨난 뒤, 그는 충격으로
인해 약간의 말더듬 증상이 생겼다. 말더듬는 목사라니. 목회자로서는 치명적인 결함을 갖게 된 것이다. 그 후로 그는 다시 개척
교회로 돌아가 목회를 보았지만, 예전만큼의 신앙을 유지하지 못하고 자주 실의에 빠졌다. 사 년 전부터 그는 목회를 접고 부동산
중개업을 한다.
당시 중3이었던 나로서는, 삼촌의 고난이 큰 충격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그를 존경했다. 그는 의지가 강하고 선한 심성을
지닌, 천성이 목회자인 사람이다. 어렸던 나는 이 불의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당신의 종이 고난받을 때, 하나님은 대체
어디에 계셨습니까?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었고, 그래서 여호와를 떠났다. 지금까지 나는
그 결정에 대해서 추호의 후회도 없다. 어떤 교인들은 내게 욥의 고난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욥처럼 하나님이 주신 고난을 믿음으로
참고 이겨내면, 결국은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시리라고 말이다. 그러나 애초에 욥이 고난받은 이유도 사탄의 꼬임에 넘어간
여호와의 히스테리 아니었던가. 피조물의 믿음을 걸고 악마와 도박하는 그런 신 따위, 내게는 필요 없다.
대학에 진학하고 成人이 되면서 나는 유물론을 내 세계관으로 받아들였다. 유물론자로서 나는 神의 존재를 믿지 않으며, 내세 또한
믿지 않는다. 우리의 하늘 위로는 천국도 없고 땅 밑으로는 지옥도 없다. 내세를 믿지 않으므로 나는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내게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다. 내게 의미 있는 것은 지금 여기 이 땅의 현실뿐이다. 내 아버지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집 떠나온 탕아”다.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버린 내게, 그러나 예수는 등 돌릴 수 없는 의미로 남아있어 왔다. 예수의 행적과 말씀은 늘 내 삶을
간섭했다. 도대체 예수는 누구인가? 신앙의 대상이 아닌 예수는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나의 예수전>을 수강했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2. 예수
예수는 나사렛 사람으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다. 그는 2005년 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서른에 광야로 나와 말씀을 전하다, 서른셋에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 그는 메시아인가? 적어도 유대민족에게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내게도,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다.
내게 있어 예수는 ‘기쁜 소식[福音]을 전하는 자’이다. 그가 전하는 기쁜 소식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금의 기독교인들이 믿듯이 내세에 세우지는 않았다. 예수는 그가 살아가던 2000년 전
세상의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 했다. 그가 믿었던 하나님의 나라란 어떤 것인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형제자매로
살아가는 나라이다. 아이들이 사자들과 뛰놀고, 독사굴에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나라(사자와 독사굴은 인간 세상에 대한
명백한 비유다). 예수는 그가 믿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으로 전하고 몸으로 실천했다. 그리고 그 말씀과 실천 덕택에, 그는
서른셋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니체는 『반그리스도』에서 예수를 한 사람의 데카당으로 보았다. 니체에게 있어 데카당이란 ‘사회의 질서에 反하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죽음을 택하는 자’이다. 헬레니즘의 질서에 반하는 데카당으로 그리스 민족에게 소크라테스가 있듯이, 헤브라이즘의 질서에
반하는 데카당으로 유대 민족에게는 예수가 있다. 예수는 금기와 허위로 가득 찬 유대교의 교리를 반대했다. 그가 믿었던 하나님의
나라는 교리를 넘어선 곳에 있었다.
예수를 십자가에서 끌어내리고 그의 머리 뒤에 걸린 휘황한 후광을 벗겨내고 보면, 그는 한 사람의 초라한 나사렛 청년에 불과하다.
광야로 나오기 전까지 그는 목수였다. 예수는 그 초라한 청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와, 그 모습을 통해 말씀을 전하고, 그 모습
그대로 십자가에서 죽었다.
예수는 우리를 저 머나먼 천국으로 인도하는 목자가 아니다. 그리고 인간은 예수를 통해 죄를 회개해야만 하는 죄인들이 아니다.
나는 집을 떠나왔을지는 모르나 탕아가 아니고, 길을 잃었을지는 모르나 어린양이 아니다. 나는 내 어깨 위에 놓인 수고로운 짐을
예수에게 부려놓기 위해 그를 만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믿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지표이자 동반자로서 예수를 만나려
한다. 그렇다면 지표로서의 예수, 신앙의 대상인 절대자가 아닌 동반자로서의 예수가 내게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가?
3. 나와 예수
기독교를 모태신앙으로 삼았던 사람에게 기독교를 버린다는 의미는 단순히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여태껏 자신이 믿어 왔던 세상을 부수는 일이며, 아버지의 법에 저항하는 일이다(나는 지금도
고향에 가게 되면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호적에서 빼버리겠다”는 협박을 받는다).
기독교인이 아닌 나에게 예수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타인에 대한 사랑이다. 예수는 사랑이 필요하나 사랑받지 못했던
사람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사람들을 사랑받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과 싸웠다. 예수의 사랑은 대상 없는 공허한
추상적 관념이 아니다. 그는 인류 전체를 긍휼히 여기는 위대한 구원자가 아니었다. 예수는 그가 살던 세상에서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던 사람들만을 사랑했고, 존중받을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던 사람들만을 존중했다. 예수의 분노는 언제나 그가 행하고자
했던 사랑과 존중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들에게로만 향했다.
‘진보’란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변혁이다. 진보를 바라는 자는 그가 몸담고 있는 세상이 왜, 그리고 어떻게 잘못되어 있는가를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내가 살아가는 21세기의 세상은 전지구적 자본주의 사회다.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은 개인의
욕망을 무제한으로 실현할 수 있는 자유다. 이 자유의 실현을 위해 자본주의는 인간의 모든 가치를 교환가치로 바꾼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란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 있는 가능성에 다름 아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이기심에 삼투하는 방식으로
확산된다. 자신의 욕망을 최대한으로 실현하는 것이 최선의 가치라고 가르쳐지는 사회. 자본주의적 자유는 평등과는 이율배반의
적대관계에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네 욕망을 실현할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평등을 헌신짝처럼
버려라’라고 속삭이는 사회다. 그러나 한 사회가 구현할 수 있는 행복의 최대치란 그 사회의 물적 토대의 최대치에 비례한다.
누군가가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덜 행복해지거나, 심지어는 더 불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인류의 이상향은 사회적 공동체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공동체만이 ‘인간다움’이 발현하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다(이것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명제의 眞意다).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필수적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가 세계 내에서 다른 현존재와 관계 맺는 방식은 배려다”라고 썼다. 이때의 ‘배려(Sorge)’란
무슨 철학적으로 난해한 심급을 가진 전문용어가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단어 그대로의 의미로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함’이다. 이 일상적인 단어가 그러나 타인과 관계 맺는 우리의 일상적인 태도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하이데거의
난해한 저작은 배려가 사라진 사회에 배려의 철학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지난한 작업이었다.
예수가 이러한 배려의 밑바탕에 두었던 것이 바로 타인에 대한 사랑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또한 예수가 믿고 바라던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땅에서 인간의 손으로 이룬 공동체적 이상향이라고 나는 믿는다. 근대의 모든 이념은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했으나,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인간의 공동체적 이상향을 위한 정신적 토대로서의 타인에 대한 사랑. 이것이
기독교를 버린 지금까지도 내게 여전히 영향을 미치는 예수의 의미이다.
권향미의 예수전
예수에대해서한번도생각해본적이없었던,
예수말고는요한이라는이름이나들어보았을까말까하는저는
어쩌면예수전을듣는데에가장적합한사람이아니었을까생각합니다.지금생각해보니..^^
정말대한민국을살아가면서교회한번안나가본사람이어디있을까마는,
그유명한성경책한번펼쳐보지않은저는,
김규항씨가하는강의라는것만으로선뜻
제생활형편으로는분명사치라고할만한강의를신청부터하고보았습니다.
늘야근에허덕이며,휴일을미리정할수도없는직장생활을하는봉급생활자로서,
매주화요일7시에전철역에서한참을걸어야만도착하는강의실에
매번참석하기란쉽지가않았습니다.
하지만,첫강의를놓치고두번째강의를듣고서저는,
제가제형편생각하지않고덥썩신청부터하고보았던강의가
제가살아오면서했던가장큰고민을즐겁게받아들이게해주리라는것을
느낄수있었습니다.
"가난해도행복할수있을까?"
주근무지가강남인근지역의백화점인저는,
아마도정신을바짝차리지않으면금새그요상한분위기에휩쓸려
명품이나탐내는그런사람으로살기쉽상이었을겁니다.
제가김규항님을또그를통해,
예수의삶을알게된것은얼마나다행인지요..
예수가가장밑바닥의삶들을가장편애했다는사실이,
가장힘겨운상황에처해있는사람을가장위했다는사실이
저에게는실로가장큰충격으로다가왔습니다.
겉모습으로돈이있어보이는사람과아닌사람을구분해
차별적으로대하고,
지하철택배를하는노인들과장애인을차별대우하는
백화점의잘차려입은직원들을보면서,
내가사는사회는왜이런가..
고민했습니다.
늘성경책도없이,그것을프린트해갈여유도없이종종걸음치다보니,
어느덧강의가끝나버렸습니다.
차분히다시읽어가며,
나의예수전을완성하고또지금과는다르게살아야겠습니다.
예수전강의를들었던것은분명그시작일테구요.
오늘뒤늦게김규항님의예수이야기와마가복음을이면지에출력하며
되뇌어봅니다.
지금예수를읽는이유를요.
안상평의 예수전
직장생활 3년 만에 나는 온통 나 자신이 뒤죽박죽 이라고 느꼈다. 직장생활의 무의미와 스트레스를 견딜 수가 없었다. 회사에
출근하면 세상은 온통 잿빛이었다. 돈과 영혼을 맞바꾸러 직장에 다닌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직장생활의 의미를 철저히
부정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열심히 재테크 책을 찾아 읽었다. 생활의 중심엔 은행잔고가 있었다. 그러니 차츰 책을 펴보고,
사회단체에도 참여하는 것도 시들했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었다. "어차피 돈 벌러 다니는데, 돈 모으는 게 현명한거 아닌가.
빨리 모아 이 생활 청산해야지"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 내가 괴물이 되어 간다고 느꼈다.
삶의 의미를 회복하고 싶었다. 진실하고 소박하게 살고 싶었다. 내 삶의 좌표가 어느 순간 사라지고, 허허벌판에 홀로 남겨진
것 같았다. 이제 어디서 좌표를 찾나, 아니 내게 좌표가 있기는 했나, 좌표를 찾아 나설용기도, 능력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연히 허울좋던 사회의식은 외피만 남았다. 술자리에서나 사회의식을 소비하며, 친구들에게 화풀이를 해댔다. 매일 남을 대하는
마음에 날이 서있고, 눈은 퀭해졌다.
이즈음, 처음으로 종교라는 것을 생각했다. 그것이 나 같이 괴물이 되어가는 인간에게 온전한 삶을 회복시켜줄 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함께.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김규항님의 블로그를 알게 되었다. 난 그곳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났다.
내게 예수님의 삶은 가장 먼저 ‘정의를 실현하는 삶’으로 다가온다. 정의는 진리이기도, 평등이기도 한 것 같은데, 아무튼
그 길의 요체는 ‘나의 이웃이 내 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내가 귀중한 만큼 남도 존귀하며, 그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없다’는 깨우침. 이 깨우침 가운데 정의, 진리를 거스르는 어떠한 것도 용납될 수 없다는 철저한 투쟁의 태도가 함께한다.
나는 이런 태도가 굉장한 것이라고 느꼈다.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이 너무나 간명했다. 이제껏 어떤 이념이나 주의로부터 나온 장황한
‘정의’의 개념에 익숙하던 내게 그런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힘있는 진리로 느껴졌다. 내 이웃이 겪는 고통과 편견과 불의가 내
몸이 당하는 고통으로 느껴지는 순간,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내가 하는 저항이야 말로 아무런 설명이 필요 없는 너무나 정당한 행위가
아닌가 말이다.
또 예수님의 정의에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징벌’ 대신, ‘사랑과 연민’이 넘쳐난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러면서도 그
‘사랑’은 ‘부정의’를 솎아내는 눈을 전혀 흐리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사랑과 연민’으로 인해 ‘정의’로 향하는 진실된
마음이 더욱 강력해 질 수 있다고 느껴졌다. 정의와 부정의를 정확히 분별하되, 그 분별함의 원천에 부정의에 대한 사랑이
넘쳐난다니. 감동이었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했을까? 예수님은 어떻게 그런 신념을 키우고 또 끝끝내지켜낼 수 있었을까? 예수님은 그러기 위해
언제나 진실하게 고뇌하셨던 것 같다. 언제나 틈틈이 하나님께 기도하셨던 같다. 오늘날 말로 하면 시간날 때 마다 묵상하고,
명상하고 또 성찰하셨다. 성찰의 대상은 언제나 앞으로 가야할 길-‘정의/진리’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나약한 존재임을
철저히 인정하고, 하느님께 언제나 ‘남을 가장 존귀한 대상’으로 바라볼 수있도록 해 달라고, 그 길에 처할 어떤 두려움도
이겨내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지 않았을까. 이런 예수님의 성찰의 과정이 점차 인간 예수를 신의 예수로 승화시키지 않았을까.
예수님을 대면한 지난 두 달, 한편으론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생애를 공부할 수 있어 행복했지만, 또 한편으론 그런 예수의
모습을 어떻게 좇아야 하는지 고민스러웠다. 앞으로 당분간 나의 화두는 ‘회사의 예수’가 될 것이다. 지난 강의 시간에도 고민을
얘기했지만, ‘회사의 예수’의 모습을 생각하고, 고민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대면하기가 갈수록 어려울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회사가 설령 지금은 ‘돌짝 밭’, ‘가시덤불’로 느껴지더라도 거기에 뿌려진 씨앗이 ‘겨자 씨’가 될 수 있도록, 난 지금 여기서 ‘회사의 예수’를 고민해야 한다.
이진경의 예수전
첫 시간에 “예수를 ‘지금’ ‘여기’ 자기 삶의 자리에서 해석하는 일은 자연스럽고 또 중요하다. 어떤 사람에게 예수는 민족해방
운동가이며, 어떤 사람에겐 영성지도자이며, 어떤 사람에겐 여성주의자이이며 다른 어떤 사람에겐 생태주의자일 수 있다. 또 다른
어떤 사람에게 예수는 교회개혁가이거나 민란의 주모자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걸 뒤집어 예수를 규정하는 것이다. 예수는 놀랍게도
그 모든 것이다. 요컨대 예수는 민족 해방 운동가이며 영성 지도자이며 여성주의자이며 생태주의자이며 교회개혁가이며 민란의
주모자다. 예수는 그런 모든 면들을 뒤섞거나 절충한 인물이 아니라 그런 모든 면들이 함께 존재하는 사람이다.”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깊이 공감을 했다. 예전에 한 강의에서 ‘잡다성’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잡다성 속의 일정 부분을 카테고리화시킨 것이
문화요 전통이지만, 이 카테고리 안에 하나님을 끼워넣으면 그것이 바로 우상 숭배가 되는 것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처럼
예수님은 모든 면이 존재하는 인물이지만, 그 중의 한 면만을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자신에게 부각되는
예수의 특성은 다를 것이다.
나에게 가장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예수의 특성은 ‘치유자’로서의 면모다. 12년 간 혈루병 앓은 여인을 싸매어 주고, 38년 된
병자를 일으키며,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고, 문둥병자를 고치는 예수. 그것은 육체적인 치유뿐 아니라 마음의 치유까지도 경험케
하는 것이다. 오랜 동안 사회에서 멸시받고 소외된 사람들이 그 멸시와 소외의 원인이 되었던 요소가 치유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인 치유로 이어지는 것은 죄가 사해지는 경우일 뿐일 텐데, 이 땅의 모든 존재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기
전까지는 멸시받고 소외되며 억압받는 자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존재할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할 일은 그런 자들의 곁에 있으면서
고통을 함께하고 영적 자유를 누리도록 도우며 조금이라도 삶의 질이 개선되도록 힘쓰는 일이라 생각이 된다.
내가 예수를 만나게 된 것은 대학 1년 때였다. 당시는 정치적인 입장이 강한 대학생들보다도 개인적 안위와 앞날에 대해 걱정하는
대학생들이 많은 분위기였으므로, 나 또한 그런 평범한 대학생 중 하나였다. 그리고 예수를 만나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지극히
평범한 연유에서였다. 외로움. 삶의 무의미함. 공허함이 그 원인이었다. 오직 대학 가는 것만을 목표로 달려왔던 청소년 시절이
끝나자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무얼 위해 살아야 할지 삶의 자리가 붕 떠 버렸다. 그런 와중에, 효과가 거의 없다는 노방
전도로 예수라는 분을 영접하게 되었고, 나는 그 때부터 열심히 예수를 믿게 되었다.
선교 단체에 들어가면서 예수에 대한 지식은 더욱 늘어갔지만, 억압적인 요소도 많았다. 늘 해야 하는 일이 많고, 예수를 섬긴다고
만든 빡빡한 일정 속에서 여러 훈련들을 받았으며, 주어진 교재와 프로그램으로 사람들을 섬겼지만 그 가운데서 영혼의 큰 기쁨이나
만족감을 찾은 적은 별로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좀더 말씀을 연구하게 되면서 예수를 더욱 인격적으로 알아갔고 그 과정 속에서
많은 치유와 자유를 경험하였다.
현재는 신앙 서적을 만드는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먼저 믿음의 길을 걸어간 신앙 선배들의 저술들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삶 속에서 경험하는 크고 작은 사건들, 어려움들을 통해 예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이 큰 낙이다. 강의를
통해서 예수님이 직접 살아 내신 시대로 들어가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주변 인물들과 정황을 상상해 보는 일은 매우 유익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정황을 이해하지 않으면 왜곡되게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을 반드시 유의해야 할 것 같다. 너무나 많은 형태의
믿음이 존재하고, 때로 자기 자신의 믿음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그래서 비그리스도인보다 더 편협하기도 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한 접근 방식이 아닌가 싶다.
요즘의 나의 과제는 주변 상황에 얽매이지 않고, 그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은 지금 어떻게 일하고
계신가, 어떻게 예수님을 신뢰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끝없이 요동치는 환경 속에서 예수를 의지하고 흔들림 없이 나아가는
신앙의 삶에 가장 필요한 자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아가 또 하나의 과제는 조금씩 더 사고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이다.
나, 내 가족, 내 동료, 내 교우에서 조금 더 범위를 넓혀 사회, 국가, 더 나아가 세계를 돌아보고 섬기고픈 마음이 든다. 그
범위의 확장은 아마 기도 안에서 가능할 것 같다.
내가 만난 예수는 철저히 이타적이었다. 그분은 이웃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을 필요가 있으셨던 분이 아니라 이웃의 필요를 나누어
주기에 이미 충만한 분이셨다. 나를 내려놓는 연습을 꾸준히 하고 예수라는 사랑의 나무에 매달려 있다면 거기서 충전된 에너지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승리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이유는 유쾌하게 잔치를 즐기기 위해서라고 한다. 어디까지 이 잔치를 즐길 수 있는지 보고 싶다.
심동우의 예수전
7살 때부터 교회에 다녔으니까 예수와 관련을 맺은 게 25년이 넘었다. 그 오랜 세월 한 인물(신과 대립되는 의미에서의
인간이라는 의미보다는 대상으로서의 의미)에 대해 듣고 고민하고 공부해왔다면 분명히 뭔가 깨달은 것이나 변한 것이 있어야 당연한
일일텐데 그렇지 않은 내 모습을 보며 내가 도대체 그 동안 뭘 한건가하는 자괴감이 자주 든다. 물론 그동안 이런저런 변화들 -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이 섞여있기는 하지만 - 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정도의 변화란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
당연히 일어나는 정도의 것들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예수는 내게 과연 어떤 존재인가.. 이 물음은 철들면서 늘 하던 고민이지만 역설적으로 한 번도 제대로 고민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예수를 사랑한다고, 내 구세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수없이 고백하고 노래하며 기도했지만 그 시간의 상당
부분이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한 종교적 행위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내 마음의 평안과 현실적 고민에 대한 도피의 의미가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예수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탐구보다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놀랍지만 막연한 껍데기에 의지해 내 마음의
평안함과 현실에서의 위로를 구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들려오는 예수의 가르침은 내 상황과 주위의 현실에 따라 굴절되기 일쑤였고, 나의 부족하고 약한
모습은 예수의 사랑에 의해 합리화되었다. 내 관심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모든 것은 이방인들이 구할 바요, 오직 너희는 주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주의 나라와 그 의'에 대한
막연하고 모호한 이해에 묻혀 슬그머니 사라졌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예수를 우습게 여기는 마음에서 온 것이다. 말로는 구세주니 어쩌니 하면서 실제로는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자판기'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아니라고 부인하려해도 내 행위나 마음의 끝에는 결국 이런저런 현실적 요구들이
있었음을 생각할 때 그동안 내게 예수는 '자판기'였던 것이다. 이런 생각도 꽤 많이 했었지만 늘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동안 아무 생각없이 해오던 것들에 대해서 다시 한 번씩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믿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곰곰히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그대로 살아내는 것이다. 막연하고 모호한 구호나 고백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 대로 사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예수는 과연 내게 어떤 존재인가. 내게 예수는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사실이 내게는 가장 중요하다.
예수가 단순한 한 사람에 불과하고 모델로서의 그 삶을 닮아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게 내 현실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삶이 아무리
가치있는 것이고 그대로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도 나는 그렇게 살 자신이 없다.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순복하면서 살면서도 그 삶을 고통스러워 하지 않으며. 세상의 위선과 가식을 깨고 그 안에 있는 본질에 반응하는 진정한 삶
말이다. 내 안의 이기심과 자기 중심성을 볼 때 내게는 그런 삶을 '제대로' 살아낼 가능성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작은 일에도
겁을 내고 움츠러들며 무슨 일에든 이해 득실을 따지는 비참한 인생인 내게는 그런 가능성이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언젠가 이런 나도 예수를 통해 예수처럼 한 번 살아볼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때문이다. 이 막연한 기대가 나의 상황과 현실에 대한 비겁한 변명이 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이 기대가 나름의 가치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내가 믿고 따르려는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나의 구세주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는 가능성이 없지만 예수를 통해서는 가능성이 생기며, 나의 한계와 악함들은 사실이지만 그 모든 것을 안고 가신
분이 예수이기 때문에 나는 나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본성은 비겁하고 약하며 이기적이지만 예수를 통한 새로운 나는
누구보다 강하고 담대한 것이다. 비록 지금은 그런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지만 예수께서는 나를 그렇게 만들어 갈 것이다. 이게 내
믿음이다. 가능성 없는 심각한 죄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자유케된 영광스러운 존재로서의 정체성
사이의 섬세하고 미묘한 조화가 내 삶을 이루는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나를 넘어서 예수처럼 살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베푸신 가장 큰 은혜요 영광인 것이다. 이런 마음이 들고 이런 고민을 하고 결국 이런 삶을 살게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요 계획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강의는 매우 심각한 도전이면서 동시에 큰 도움이 되었다. 도전이 된 것은 그동안 막연하게 예수를
따른다고 했던 내게 예수의 삶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삶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강의 중에도 언급되었지만 우리 교회의 현실을 생각해볼 때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결국은 자기가 만든 어떤 존재를 예수라 생각하고 있는 게 사실이고, 심지어 교회에서도 잘못된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 상황에서
예수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고 그 본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모든 것을 흔들 수 있는 위험한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예수에 대해서 잘못된 이미지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음을 이번 강의를 통해서 많이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일들이 상당 부분이 예수와 관련 없는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점에서 앞으로의 삶에서 이번 강의를
통한 도전은 과연 내가 하는 일이 예수께서 원하시는 것일까하는 고민을 줄 것이다.
이것은 도전이면서 동시에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큰 도움이기도 하다. 예수를 둘러싼 종교적 아우라에 갖혀서
허우적대면서도 그저 믿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던 내게 안개가 걷히는 듯한 개운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수를 따르는 것이 뭔가
특별하고 거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예수처럼' 사는 것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전에도
'예수처럼' 살자는 생각이야 늘 했었지만 그것은 늘 막연한 결심이었고 이번에는 훨씬 구체적으로 그런 결심들을 하게되었다. 보이는
것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며 더 크고 중요한 것이 있다는 인식이야 늘 있었지만 그런 생각만으로는 부족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면 이미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가치있는 것을 소유한 것이므로 더 이상의 소유과 추구는 욕심일
수 있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면서 몸 속 깊이 박혀버린 돈과 명예, 권력에 대한 추구도 예수 앞에서는 모두 허망한 일이다.
예수가 바라는 것은 내가 세상이 주는 것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찾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필요한 일에 사용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것들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한 한사람 한사람의 가치를 회복시키고 그들의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 것이리라. 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를 바라보고 그들을 위해 살게 되는 것이리라. 그것은 세상의 질서를 완전히 뒤엎는 일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 세상은 견디지 못할 것이고 나 역시 계속 넘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보면 조금이라도
예수의 모습을 닮아갈 수 있지 않을까...
말로 예수를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는 것에는 자신마저 속일 수 있는 위험성이 내재되어있다. 믿음이라는 것이 실제로 어떤
영향을 내 삶에 미치지 않고 그냥 공허한 생각에 그친다면 그것은 오히려 없느니만 못할 수도 있다. 믿는대로 살 수 있는 용기와
의지가 내 삶에 생기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것은 나를 의지하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오직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한 것이다. 그래야만 이렇게 살 수 있는 힘과 의지가 내 안에 생길 것으로 믿고 있다.
조영규의 예수전
아들에게
요즘 첫 영성체 교리를 받느라 많이 힘들지?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미술학원도 포기하고 매일 성당에 나가는 모습이 기특하고 아름다워 보이는구나
아빠는 사실 성문이가 배우는 교리공부가 꽤 궁금하단다. 성당 선생님은 어떻게 가르치시는지도 궁금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네가 어떻게 어려운 성경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도 궁금하단다.
왜 그럴까? 아빠가 왜 성문이가 아는 성당과 예수님에 대해 궁금해 할까?
그 이유는 아빠가 이제 마흔이 넘어서야 성경과 예수님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고 앞으로 너그리고 아빠가 아는 예수와 네가 알고 있는 예수가 어떻게 다르고 정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같이 얘기할 기회를 갖고 싶어서 이지.
아빠가 알고 있던 예전의 예수님은 2,000년 전에 태어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 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힌 성스러운
분으로만 알고 있었단다. 그밖에는 교회나 성당에서 목사나 신부가 말하는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이해뿐이었지. 또 그렇게 심각하게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크게 한적도 없었어
아무래도 아빠는 우리의 삶이 목회자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축복받지 못했고 그토록 많은 교회와 성당이 있으면서도 사람들이 행복해 하지 않은 것을 보면서 예수님을 그렇게 훌륭한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아.
지금 아빠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세상 어떤 사람보다도 위대하고 훌륭한 분이란다. 그 이유는 간단하게 말하자면 예수님이 살던 그
당시에 가장 못살고 굶주린 사람이나 병든 사람들이나 세상사람들이 멸시하던 사람들을 사랑하고 같이 함께 했으며 한편에서는 하느님을
팔아 자기 이익만을 챙기는 높은 지위를 가진 자들을 경멸하고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제국의 지배자들에게는 당당한 모습을 보였던
분이란다.
아빠가 존경하고 배우고자 하는 예수는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과 옳지 못한 일에 대항하는 모습들 바로 성경 속에 나와 있는 예수의 생애란다.
지금 성문이가 열심히 외우고 있는 삼종기도나 사도신경도 중요하겠지만 앞으로 많이 보게 될 성경책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과 하셨던 말씀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이 기도나 성당에 가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아빠는 생각한다.
성문이는 하느님이 하늘나라에 있다고 생각하니? 아빠는 아직 잘 모르겠어. 다만 예수님이 그 많은 고난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느님을 믿고 그 뜻에 따랐다는 것을 보면 우리가 믿던 안 믿던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큰 어떤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든단다.
성문이도 앞으로 하느님에 존재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될 거야. 누구나 그렇듯이. 그러나 이런 생각만으로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니고 성경책과 그 속에 예수님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예수님을 따르려고 할 때 답이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아빠는 요즘 성경책을 보면서 “나도 어려운 이 책을 성문이나 어린 친구들이 어떻게 읽을까?"하는 생각도 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성경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어른들은 성경은 쉽게 이해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거나 아이들은 기도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예수님은 어린이를 사랑하셨고 하느님의 나라는 어린이의 마음과 같이 순박한 마음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했는데
말이다
아빠가 성문이나 친구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성경, 그 중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한번 쉽게 적어 볼까 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아빠도 이해 못하는 부분은 빼서라도 성경 속의 예수님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글로 적어 보려고 해. 기대해 주기 바란다.
그럼 이만.
사랑하는 아빠가
김광현의 예수전
흰 얼굴 슬픈 눈
성스러운 빛 얼굴을 밝히고
우리 위해 오셨네
죄많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다 이루었네 다 이루었네
아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다
나무 깎으며 흘린 땀
메마른 들판 위 깨달음
헐벗고 가난한 이 주인되는 세상
슬프고 서러운 이 대접받는 세상
네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인 세상
모두모두 형제자매
천국을 보았어 하나님을 알았어
지금, 산 예수를 따라 웃는다
이승리의 예수전
#1.
예수님이라는 이름에 매이지 않기.
그 이름만으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거나 양심의 문제를 덜어내지 않기.
중요한 것은, 그의 '말씀'이고, 더 중요한 것은, 그의 '말씀'대로 살기.
그렇다면, 그분에 대한 지식이 중요하기 보단, 그 삶의 방식을 따르기.
#2.
좋아. 거기까지는 동의.
절대 공감.
질문 하나.
삶의 방식을 따르기 위해서, 그분의 삶을 들여다 보고, 따르기로 한다면,
지금 당장 내 곁에 있는 사람, 좀더 가까이에서 그 분의 사상, 삶의 양식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예수님처럼 살다 간' 분들의 삶을 선택하고, 삶의 표지로 삼는 것은 어떤?
류영모 선생님이나 함석헌 선생님 같은 분은,
그 제자들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참나를 찾은 분들이라고 하는데,
그 분들의 삶의 궤적은 2000년 전에 사셨던 예수라는 인물에 대해서 그 후대 사람들이 어릿하게 기록해 놓은 삶보다 훨씬 뚜렷하고, 훨씬 생생하지 않나?
만약..
그래도 예수님이라면,
그래도 예수님이 현존했던 인물들 중 가장 신과 가까이 계셨던 분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2000년 전에 현대의 가치를 실천하셨던 분이기에?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대속을 위한 속죄양이 아니고.. 하는 것들은,
그렇다. 사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리라.
하지만, 그 부분이 아니라면, 예수님과 다른 현인, 군자들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그 부분이 정말 예수님을 예수님 답게 하는 것일 텐데.
그게 무엇일까?
적어도, 나에겐, 지금 어떤 합리적인 이유를 당장 들 수 없을지라도, 아니면 30년 가까이 그렇게 세뇌(?)되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예수님은 적어도 다르다. 근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근거를 대라면?
#3.
모태신앙이어서, 이름도 교회 전도사님이 지어주셨다.
고등학교때까지.. 그렇게 교회 안에서, 부흥회, 수련회때도 열과 성을 다해 기도하고, 뭔가 조금이라도 다른 것들이 감각에
느껴지면, 아, 이게 은혜로구나. 하며, 방언기도와, 작은 것들에 대한 간증까지.. 나름 참 열심히 그 틀 안엔서 만족하면서,
늘 기도로 회개하면서, 돌이키면서.. 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대학교때 서울로 유학을 와서..
어릴적부터 다니던 교회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고, 다시 하나의 교회를 선택해서 그 공동체 안에 들어가 신앙생활을 해야겠다 싶었다.
그러나 쉽게 내 교회,라는 인식을 주는 곳은 없었고, 머리는 큰지라, 목사님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신념, 개인적인 가치관을 마치 성경에서 이야기 하듯, 성도들에게 설교하는 모습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교회를 떠돌고..
그러다가 다일 교회를 알게 되어 가끔씩 출석을 하게 되었고, 그 교회가 추구하는 가치들이 나름 나에게 감동을 주어, 가끔씩.. 그렇게 가서 마음의 평화(?)를 얻는 날이 있었다.
학교앞 작은 서점에서 책을 고르다가 발견한
<열린 종교를 위한 단상> 오강남교수가 쓴 책.
이 책을 읽고 나서.. 교회라는 체제에 대한 반감이 더욱 거세졌다.
그리고, 나 자신 기실 성경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기존에 알고 있었던 것은 버리게 되고, 결국 내 안에서는 새로운 예수님의 모습을 세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공백이었다.
갖고 있던 건 버리고, 채울 건 아직 채워지지 못하고.
김규항선생님의 글을 씨네21에서 한 번 보았다. 청년 예수에 대한 칼럼. 젤 마지막 페이지에 실렸던. 그걸 보고, 그분에게 메일을 써볼까. 찾아가서 한 번 물어볼까 싶었다.
어떻게 "전 세계에서도 작은 나라인 대한민국의 한 청년의 심장마저 뒤집지 못하는 기독교가 무슨 소용이 있는지를 물었던 어느 청년의 마음이 그렇게 확 바뀔 수 있었는지"를.
나 역시 그렇게 내 삶이 뒤집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에..
그 후로, 계속. 정신도 마음도 떠돌고, 계속 버리기는 하는데 채워지는 것은 없는.
그런 삶이 계속 되었다가, 예수전 강의를 듣게 된 것.
서론이 길다.
그분에 대한 지식. 동정녀 마리아, 대속신앙,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한 지식들이 사실일수도 있고, 허구 일수도 있다는 것. 근데 그게 중요한 건 아니라는 것. 좋다. 거기까지는 동의.
그리고, 그분이 나에게 갖는 의미는.
적어도, 내 삶을 인간의 눈이 아니라 신의 입장에서, 처음이자 끝이고, 존재이자 비존재이시고, 인격이자 비인격이며, 절대적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범주에 들지 않는 분의 시각으로 들여다 보고 살펴 보고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 하나.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이 어려운 일들, 힘든일이 생겨도, 결국은 큰 길로 봐서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준비 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그리고, 그분 앞에서 겸손하기. 삶을 살면서도.. 역시.
또. 지금은 전혀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지만, 예수님처럼 살기.
나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을 돕고, 양심을 지키고, 좋은 일 하는 사람들과 벗이 되고, 인격적으로 하나 둘, 나를 가다듬어 가기.
내 주위의 사람들 안에 있는 신성을 보고, 존재 자체를 귀중하게 여기기.
내가 다른 사람, 다른 생물, 다른 무생물과 이어져 있음을 잊지 않기.
그리고, 궁극적으로 내가 하나님께서 귀한 존재로 만들어 주신 나름의 소중한 존재임을 인정하기.
그리고... 이런 것들 이상의 내가 아직 접하지 못한.. 차원은 조금씩이나마 넓혀 가기.
#.
엄마의 신앙.
늘 뭔가 잘못했고, 늘 내가 교만했고, 늘 다른 사람들에게 뭔가를 배우고,...
그게 얼마나 큰 상처일까. 일말의 자존감도 없이.. 끊임없이 자기를 내치고, 자기를 낮추는 그 과정만 엄마의 50평생 삶에는 남아 있다.
그 신앙의 모습은 축제도 아니고, 기쁨도 아니고, 안타까움의 연속, 눈물의 연속. 금식, 고행의 연속..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삶의 모습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엄마 자체의 삶도 얼마나 소중한 삶인데, 누가 함부로 그걸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있을 것인지..
임지희의 예수전
예수는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는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여인에게서 태어났고, 자라는 동안 사람과 하나님이 보시기에 매우 사랑스러웠다.
서른 살까지 그는 그저 평범한 목수로 살았다. 자신에게 세례를 준 요한이 헤롯에게 잡히자 예수는 직접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는 낮고 천한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 사랑하고 격려하며, 하나님 나라의 신비한 비밀을 가르쳤다. 그는 환자를 회복시키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가난한 자를 먹이는 등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셨다. 그가 기적을 일으키는 걸 보고 제자들은 그가 메시아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제자들과 민중은 예수의 메시지를 이해하기엔 너무도 무지했고, 어리석었다. 예수는 그들에게 비유로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결국 그들은 예수를 배신했다.
열두 제자 중의 한 명인 유다가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예수를 팔았다. 그러나 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떳떳하게 자신이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시인한다. 그로 인해 침과 주먹질과 손바닥이 그의 얼굴을 강타했다. 그는 자신을 변명하지
않았다.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삶에 집착하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의 원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대로 모든 일을 이루라고
기도하셨다.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 순간,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 이로써 그는 인간이 하나님과 직접 만나 교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인간은 하나님께 직접 원하는 바를 간구할 수 있게 되었고, 직접 회개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순전한
동물의 피는 필요 없게 되었다. 예수 자신이 단 한 번에, 영원히 인류의 죄를 대속할 순전한 어린양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로 인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친구처럼, 부모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예수는 더 이상 구약의 하나님처럼 율법이 인간을 통제하지 않도록 그 자신이 새로운 법이 되었다. 그는 율법의 완성이란,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부활하고 승천한지 2천여 년이 지나는 동안 그(의 메시지)는 여러 모양으로 곡해되었고, 권력에 이용당하기도 했다.
오늘날 역시, 이 단순하고 명징한 예수의 메시지는 그를 따른다고 하는 제자들(기독교인)에게조차 선택적으로 수용될 뿐이다.
예수는 어부였던 제자를 복음을 전파하는 위대한 인물로 바꾸셨듯이, 죽은 자를 살리시고, 사도 바울의 인생을 뒤바꾸셨듯이, 오늘날 그를 만나는 우리의 인생을 바꾸시고, 업그레이드 시키신다.
예수는 21세기인 지금 살아계시다. 하늘에, 지금 여기에, 그리고 내 안에도.
살아서 활발히 역사하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