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교기념일 모임 이후 금요일모임에 참석하기로 했었다. 12시에 4명이 모여서 구월산으로 출발- 구월산은 부산대학교에서 보면 바로 앞에 버티고 있는 산이다. 작년에 한번 간적이 있었기에 조금 여유었지만 초입의 조금만 방심하면 자전거가 뒤로 넘어질것 같은 정도의 급경사는 여전히 힘들었다. 임도를 오르고 힘들어 하고 조심조심 가끔은 속도를 내어 울퉁불퉁한 산길을 내려가기도 했다. 오늘 코스는 정상까지!
끌바(자전거를 탈수 없는 지형에서 끌고 가는것)와 들바(자전거를 끌수도 없는 지형에서 들고 가는것)를 번갈아 하며 가파른 산길을 올랐다. 산림감시공익요원으로 근무하며 산길에는 나름 단련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오랫만이라 그런지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래도 정상은 우리를 기다려주었고 결국 도착. 바람을 맞으며 속세를 좀 내려다 보다가 하산하기 시작했다..신나는 다운힐!! 이 아니라 이건 뭐..미친놈도 아니고 자전거를 타고 급경사길을 내려가기 시작한 순간 내가 왜 이런 비상식적인 짓을 하고 있는건지하고 살짝 회의가 들었지만 곧 생각할 여유는 사라졌다. 내가 가진 기량과 반사신경을 다 동원해서 등산로를 내려가는데 분명히 넘어질것 같은데 여기서는 넘어질것 같은 느낌인데 그러면서도 안넘지고 용케 균형을 잡으며 나무뿌리를 넘고 큰 돌을 피하고 어찌어찌 용케 내려갔다. 롤러코스터는 비교도 안되는 짜릿함.
임도를 따라 내려가면서 약간 속도를 내다가 자갈밭에서 미끄러져 앞으로 넘어졌다. 장갑덕분에 손은 안다쳣고 왼쪽무릎이 살짝 까지고 오른쪽 정강이가 찍힌 정도라 다행이다. 그러게 까불면 안된대도.
점심으로 밀면을 먹고 약간 아쉬운 감에 학교를 한번 올랐다가 집에와서 씻었다. 이제 찬물로 샤워할수 있는 계절이다.
폰카로 찍은 사진
옛날의 배우는 자는 반드시 스승이 있으니, 스승이란 것은 도를 전하고 업을
주고 의혹을 푸는 때문이다. 사람은 나면서 이(도)를 아는 자가 아니면 누가 의혹이 없을 수 있으리오. 의혹이 있으면서 스승을
좇지 않는다면 그 의혹됨이 마침내 풀리지 않을 것이리라. 나의 앞에 (세상에) 나서 그 도를 들음이 진실로 나보다 먼저라면 나는
좇아서 이를 스승으로 삼고, 나의 뒤에 났더라도 그 도를 들음이 또한 나보다 먼저라면 나는 좇아서 이를 스승으로 삼는 것이니,
나는 도를 스승으로 삼는 것이라. 대저 어찌 그 나이가 나보다 먼저거나 뒤에 남을 가리리요. 이런 까닭으로 귀함도 없고 천함도
없으며, 어른도 없고 젊은이도 없고, 도의 있는 곳이 스승의 있는 곳이니라.
아아, 사도가 전하지 못함이 오래도다. 사람들이 의혹이 없기를 바라나
(이것은) 어렵도다. 옛 성인은 그가 사람에서 뛰어남이 멀건만 오히려 또한 스승을 좇아서 그에게 물었거늘, 지금의 여러 사람들은
그가 성인에서 뒤떨어짐이 또한 멀건만 그러나 스승에게 배우기를 부끄러워하니라. 이런 까닭으로 성인은 더욱 성스러워지고 어리석은
자는 더욱 어리석어지느니, 성인 성인된 까닭과 우인이 우인된 까닭이 그것이 모두 여기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그 자식을 사랑하려는 스승을 가리어 이를 가르치고 그 몸에 있어서는 어떤
이를 스승으로 삼기를 부끄러워하니, 미혹하도다. 저 동자의 스승은 이에게 글을 가르쳐 주되 그 구두(句讀)를 익히는 것뿐이니,
내가 말하는 바 그 도를 전하고 그 의혹을 풀어 주는 것은 아니니라. 구두를 알지 못하는 것과 의혹을 풀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혹은 스승을 두기도 하고 혹은 그렇지 않기도 하니, 작은 것은 배우면서 큰 것은 버리는 것이라 나는 그 밝음을 보지 못하겠도다.
무당, 의사, 악사, 백공의 사람들이 서로 스승으로 삼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거늘, 사대부의 족속은 , '스승이라' '제자니' 운운하면, 곧 무리로 모여서 이를 비웃고, 이(까닭)를 물으면 곧
말하기를, '저와 저는 나이가 서로 같고, 도가 서로 비슷하니, 지위가 낮으면 부끄러함에 족하고, 벼슬이 성하면 아첨에 가까운
것이라' 하니 아아, 사도가 회복되지 못할 것을 (가히) 알 수 있도다. 무당, 의사, 악사, 백공의 사람들을 군자는 상대도
하지 않거늘, 이제 그들의 지혜는 곧 도리어 (능히) (저 사람들에게) 미칠 수 없으니 그것은 (가히 ) 괴이하게 여길 만하지
않은가.
성인에게는 상사가 없도다. 공자는 담자, 장흥, 사양, 노담을 스승으로
삼으시니, 담자의 무리는 그들의 어짊이 공자에게 미치지 못함이라. 공자 말씀하시되, '세 사람이 가는 데에 곧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하시니, 이런 까닭으로 제자는 반드시 스승만 같지 못지 않으며, 스승은 반드시 제자보다 어질지는 아니하다.
도를 듣는 것이 선후가 있고 술업에는 전공이 있으니. 이와 같을 따름이니라.
이씨의 아들 반이 나이 열 일곱에, 고문을 좋아하여 육예와 경전을 모두
이것을 통습한지라 시속에 구애되지 않고 나에게 배우기를 청해 왔거늘 나는 그가 (능히) 고도를 실천할 수 있음을 가상히 여겨
(이) 사설을 지어서 (써) 그에게 주노라.
한유
중국 당(唐)나라의 문학자 ·사상가.
자 퇴지(退之). 시호 문공(文公). 회주(懷州) 수무현(修武縣:河南省)
출생. 792년 진사에 등과, 지방 절도사의 속관을 거쳐 803년 감찰어사(監察御使)가 되었을 때, 수도(首都)의 장관을
탄핵하였다가 도리어 양산현(陽山縣:廣東省) 현령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소환된 후로는 주로 국자감(國子監)에서 근무하였으며,
817년 오원제(吳元濟)의 반란 평정에 공을 세워 형부시랑(刑部侍郞)이 되었으나, 819년 헌종황제(憲宗皇帝)가 불골(佛骨)을
모신 것을 간하다가 조주(潮州:廣東省) 자사(刺史)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헌종 사후에 소환되어 이부시랑(吏部侍郞)까지 올랐다.
문학상의 공적은 첫째, 산문의 문체개혁(文體改革)을 들 수 있다. 종래의
대구(對句)를 중심으로 짓는 병문(騈文)에 반대하고 자유로운 형의 고문(古文)을 친구 유종원(柳宗元) 등과 함께 창도하였다.
고문은 송대 이후 중국 산문문체의 표준이 되었으며, 그의 문장은 그 모범으로 알려졌다. 둘째, 시에 있어 지적인 흥미를
정련(精練)된 표현으로 나타낼 것을 시도, 그 결과 때로는 난해하고 산문적이라는 비난도 받지만 제재(題材)의 확장과 더불어
송대의 시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사상분야에서는 유가의 사상을 존중하고 도교 ·불교를 배격하였으며, 송대 이후의
도학(道學)의 선구자가 되었다. 작품은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40권) 《외집(外集)》(10권) 《유문(遺文)》(1권) 등의
문집에 수록되었다.
MTB의 탄생과 보급 1970년대 캘리포니아에서 개발되어 하이브리드형과 함께 21세기형 탈것으로 월간 바이시클라이프(2003년 3월호)
게리 피셔를 비롯한 젊은이들이 1970년대에 캘리포니아 산속을 달리면서 개발한
마운틴바이크(MTB)는 자전거 세계를 크게 바꿔 놓았다. MTB는 이어서 하이브리드형까지 나오게 해서 자전거를 튼튼하면서 타기
편한 것으로 만들었다. 산길과 비포장도로까지 활동범위를 넓힌 MTB와 하이브리드형은 자전거의 실용성을 크게 높이며 21세기형
탈것으로 떠오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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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100년 동안의 자전거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은 마운틴바이크(MTB)의 등장이다. 1970년대 중반 원형이 나타나
80년대에 MTB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은 새 탈것은 편리한 하이브리드형도 탄생시켜, 자전거가 90년대에 큰 붐을 이루며
21세기형 탈것으로 떠오르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20세기 들어와 자전거는 크게 보급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가볍고 속도가 빠른 로드형과 실용자전거로, 모두 포장도로를 달리는 데
어울리게 만들어졌다. 새로운 MTB의 등장으로 자전거는 산길과 비포장도로까지 달리면서 활용범위를 넓혀주었다.
‘MTB의 아버지’ 게리 피셔와 요람 탬산
MTB는 자전거를 더욱 쓸모 있고 사랑받는 탈것으로 만들었다. 미국에서 탄생한 MTB 개발에서 결정적인 구실을 한 이가
‘MTB의 아버지’라 불리는 게리 피셔(Gary Fisher)이고, 요람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북쪽에 자리한 마린카운티의
탬산(Mt. Tam)이다.
샌프란시스코 금문교를 지나 도심에서 20km 떨어진 곳에 있는 탬산(공식이름은 Mt. Tamalpais)은 784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경치가 좋아 많은 등산객이 찾는 명소다. 1960년대 말, 소방관들이 다니는 산속 길을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색다른
자전거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협곡일당(canyongang)이라 불리는 이들은 1930년대에 처음 대형 타이어를 달고 튼튼한
구조로 나와 사랑받았던 스윈 엑셀시오를 조금 손본 뒤 험하게 산길을 내달렸다(협곡 일당에 관해서는 본지 2002년 12월호에
실린 게리 피셔 칼럼 ‘MTB 발상지 마린카운티의 라이더 vs 등산객’을, 탬산의 현재상황은 2003년 10월호의 ‘MTB
탄생지 탬산을 가다’를 참조). 이들은 탬산 꼭대기에서 계곡까지 자전거로 레이스를 즐겼고, 오를 수 있는 길은 어디든 다
다녔다. 게리 피셔는 70년대에 이들에 합류했다. 이 무렵 조금 손을 본 자전거는 클렁커(klunker, 또는 clunker)라
불렸다.
1950년 마린카운티에서 태어난 피셔는 12세에 자전거 레이스를 시작했고 14세 때는 경기시즌이 끝난 뒤 험로를 달리는
사이클로크로스 레이스에도 출전했다. 68년 18세이던 그는 장발 때문에 레이스 출전을 거부당하기도 했다(68년 해제). 그는
로드와 트랙 레이스에서 좋은 성적을 올려 한때 미국 올림픽팀 후보선수로 꼽혔다.
게리 피셔와 친구들의 탬산 라이딩에서 가장 이름난 것이 산길을 빠른 속도로 내려가는 ‘다운힐’이었다. 변속기가 없고 브레이크도
페달을 거꾸로 밟아 감속하는 코스터형이어서 초기 클렁커들은 쉽게 망가졌다. 특히 브레이크가 과열되어 레이스가 끝나면 그리스를
‘다시 칠해야(repack)’ 해서 다운힐 대신 ‘리팩 레이스(Repack race)’라 불렸다. 피셔는 이 레이스를 위해
1974년 튼튼한 프레임을 쓰면서 뒷바퀴에 5단 변속기와 대형 브레이크를 갖춘 클렁커를 만들었다. MTB의 원형이 된 피셔의 새
자전거는 인기를 모았다.
탬산에서 젊은 라이더들이 벌이던 리팩 레이스가 공식으로 열린 것은 1976년 10월이었다. 탬산 속 파인산(537m)의 산길에서
표고차 400m, 길이 3.4km 코스를 다운힐하는 경기였다. 이 레이스는 71년부터 피셔의 룸메이트로 뒤에 피셔와 함께 MTB
제작회사를 세우는 찰리 켈리가 마련했다. 피셔보다 5세 위인 켈리는 몸무게가 91kg을 넘어 자전거 달리기도 했지만 레이스 주관
등에 큰 열의를 보였다. 1회 때는 7명이, 1주일 뒤에 열린 2회에는 9명이 출전했다. 이 해에는 9회, 77년에는 8회,
78년 3회, 79년 2회가 열렸고 MTB가 제대로 나오던 83년과 84년에는 각 1회로 위험한 리팩 레이스는 막을 내렸다.
1회 대회에는 출전하지 않았던 피셔는 그 뒤 모두 4회 우승했다. 그는 77년에 열린 레이스에서 4분22초의 코스기록으로
우승했다. 평균시속 46.7km의 스피드로, 이 기록은 그 뒤에도 깨지지 않았다. 2위 기록은 2초 뒤진 조 브리즈였고, 그는
10회 우승했다.
레이스 때마다 클렁커의 말썽으로 중도탈락하는 이가 많았다. 리팩 레이스에서는 라이더의 달리는 솜씨가 승패를 갈랐고 프레임,
변속기, 브레이크와 그 조작방법, 핸들 등에서 누군가가 조금 새로운 것을 쓰면 모두 다투어 모방했다. 리팩 레이스는 MTB를
위한 또 하나의 요람이었다. 이 레이스가 없었으면 MTB는 다른 모양이 될 수 있었고, 또 공식 등장이나 보급시기도 훨씬 뒤졌을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74년의 리팩 레이스용 자전거에 이어 피셔는 75년 개량형을 만들고 다음해에는 판매용 클렁커를 꾸몄다. 이들 모델의 바퀴는
26×2.125인치로 뒤에 MTB의 업계 표준이 되었다. 그뒤 피셔와 켈리는 조 브리즈와 톰 리치 등 뛰어난 레이서인 젊은
프레임 제작자에게도 프레임을 부탁해서 클렁커를 만들어, 일부는 팔고 하나둘 자신이 타기도 했다. 마린카운티에서 젊은이들이 만든
클렁커는 76년 20~100대, 77년과 78년은 각각 100대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모두 스윈 자전거를 개조하거나 요즘
MTB와 비슷한 새로운 프레임으로 꾸민 것들이다.
1979년 마운틴바이크사에서 판매 시작
튼튼한 프레임, 다단 변속기, 말 잘 듣는 강력한 브레이크, 직선형에 가까운 핸들, 대형 타이어로 꾸며진 클렁커들이 인기를 얻자
피셔와 켈리는 1979년 마운틴바이크(MountainBike)사를 세워 신형 자전거를 팔기 시작했다. 이 때가 공식적으로는 처음
MTB가 등장한 것으로, 첫해에 160대, 80년에는 1천대가 팔렸다. 미국에서 MTB 판매는 79년 200대, 80년
300대, 81년 2천대였고 82년에는 대량생산된 모델이 등장해 5천대로 늘어난 뒤 83년에는 5만대로 급증했다.
산악자전거를 뜻하는 마운틴바이크라는 말은 1869년 독일의 한 잡지가 커다란 기구의 도움을 받으면서 산길을 오르는 자전거 그림을
싣고 Gebirgevelocipede(mountain bike)라고 설명한 데서 비롯되었다. 1970년대 중반 캘리포니아에서
클렁커를 타던 히피가 마운틴바이크라 불렀고, 이 말을 들은 어느 영업사원이 78년 찰리 켈리에게 제품에 이 이름을 쓰라고 해서
켈리와 피셔는 다음해 회사를 세우면서 MountainBike라 이름지었다.
켈리는 1980년 변호사를 통해 마운틴바이크를 상표로 등록하기로 했다. 심사관은 이 탈것이 “산에서만 타는 것인가?”하고 물어 변호사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아 상표등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저전거 전문지 ‘Bicycling’은 마운틴바이크가 알맞은 이름이 아니라면서 새 이름을 공모했다. 이때 생긴 것이 ATB(All
Terrain Bicycle)로, 이 월간지는 ATB를 고집하여 3~4년 동안 혼란이 왔으나 애호가들은 MTB쪽을 좋아해서
일반화되었다.
MTB의 초기 바람에 재빠른 반응을 보인 업체는 일본의 시마노다. 1981년 샌프란시스코 근방에서 이상한 자전거들이 무리지어
달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미국시장 담당이던 현 회장 시마노 요시조는 현지를 찾아, 산길을 즐겁게 내달리는 젊은이들이 “자주
말썽 나서 야단이다. 튼튼한 부품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 MTB의 앞날을 내다보았다. 그는 힘들게 본사측을 설득하여
부품 개발에 착수해서 82년 전용부품인 데오레 XT를 내놓았다. 유럽의 이름난 메이커들이 MTB 바람을 ‘한때’의 유행으로 여겨
외면했던 것도 시마노가 MTB 부품업계에서 독주하는 요인이 되었다. 로드형에서도 유명부품을 섞어 쓰는 일이 있었으나 MTB 등장
뒤 성능과 품질을 인정받은 부품을 모아 완성차를 내놓는 일이 상식이 되었다.
게리 피셔를 비롯한 여러 명의 클렁커 라이더들의 힘으로 완성된 MTB는 80년대에 미국에서 시민권을 얻고 세계적으로 번져갔다.
미국에서는 83년 전체 자전거 판매량의 5%뿐이던 MTB가 93년에는 95%로 늘어났다. 여기에는 튼튼하고 자세도 편한 MTB와
가볍고 경쾌하게 달리는 로드형의 장점을 절충한 하이브리드형이 90년대에 큰 인기를 얻은 것도 큰 힘이 되었다.
83년에는 미국오프로드자전거협회(NORBA)가 발족되고 뒤이어 국제산악자전거협회(IMBA)도 태어났다. MTB는 1990년
국제자전거연맹이 공식 인정해서 첫 MTB 세계선수권경기도 열렸다. 세계적인 열기로 96년 애틀란타올림픽 때 MTB는 시범종목이
된 뒤, 2000년에 열린 시드니올림픽에서는 공식종목으로 경기가 진행되었다.
MTB와 이어서 등장한 하이브리드형은 자전거를 더욱 편리하고 실용성 높은 탈것으로 떠올렸다. 이들이 90년대의 새로운 자전거
바람의 바탕이 되었고, 이 바람은 연료가 필요 없고 공해도 없는 교통수단인 자전거를 건강과도 결부시켜 21세기형 탈것이 되게
했다.
이같은 MTB의 밝은 앞날을 바라보면서 MTB 개발과 완성에서 주역으로 활동한 일꾼들은 모두 자전거에 연관된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있다. 이제 53세가 된 1등공신 게리 피셔는 ‘게리 피셔 바이시클’을 운영하면서 레이싱팀을 갖고 스스로도 힘든 레이스에
직접 뛰어들고 있다. 리팩 레이스의 주역 찰리 켈리는 필자로 크게 이름을 떨치고 있고, 조 브리즈는 ‘브리즈 바이시클’의
사장이다. 뛰어난 프레임 제작으로 크게 공헌한 톰 리치도 ‘리치 디자인회사’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Gary Fisher and Clark Natwick challenging Golden Gate Park’s log barricades in this December, 1975 event, just a week before the 1st ever US CycloCross Championships in Berkeley’sTilden Park. Photo by: Ray Stafford
5월14일 2시에 단골가게인 부산대학앞 자이언트 대리점에 바로 그(!) 게리 피셔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원래 일정은 서울과 대구만 가는것이었는데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회먹으러 부산까지 왔다고 한다. 1시 좀 넘어서부터 가서 소일거리러 한자를 외우며 기다렸지만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는 게리피셔. 좀 늦어진단다. 세시가 되어도 오지 않아서 가게앞에서 부자모 사람들과 분명 자전거를 타고 오느라 늦는거라는등 영양가없는 농담을 하고 있는데 다가오는 검은 밴! 그분이 오셨다!!!
차에서 내린 그에게 "굿 애프터 눈~"하고 인사를 건네고 악수를 했는데 참 크고 따뜻하더라- 홍보가 덜 되어서 10명 내외의 조촐한 인원이 그를 기다렸다. 가게 안으로 가서 기념 촬영도 하고 티셔츠에 사인도 받았다. 뭔가 말을 더 건네보고 싶었는데 뻘쭘한 분위기를 깰 수가 없었다. 그를 계속 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설레여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사람은 어째 또 산에서 자전거를 탈 생각을 다 했을꼬.. 자전거에 사인을 받았다. 그의 이름이 붙은 메이커의 자전거는 아니지만 산에서 달릴수 있는것이라면 다 그의 자식이 아닐까.
비가 내렸다. 일을 마치고 비를 맞으며 집으로 가는 길은 나무에서 떨어진 꽃으로 덮여있었다. 숲냄새와 비냄새를 맡으며 내려가는데 길이 참 이쁘다는 생각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수가 없었다. 꽃길이 끝나가는 곳에서 지금 나는 가진것은 별로 없지만 모든것을 다 가지고 있다고, 이렇게 살아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침부터 인스턴트 커피 한잔 말고는 아무것도 먹은게 없어서 허기가 졌지만 머리속은 되려 맑아져서 식욕이 일지 않았다. 하지만 토요일에는 언제나 쉬던 카레가게가 문을 열었다는것을 기억해낸 순간 발길은 절로 그쪽으로 향하는것이었다.
어제 김정남쌤께 빌린 우산을 돌려드리려 갔더니 먹을걸 주셨다. 내일 도서관에 전시행사가 있다고 그걸 준비하시느라 저녁드시고 남은 토스트다. 방금 저녁먹고 일하러 왔어도 그새 배가 고파져서 언제나처럼 사양않고 먹었다. 내일 전시에 쓸 목판에 곰팡이가 펴서 그걸 털어달라고 부탁하셨다. 삭삭 솔로 문질러 털어냈다. 목판에 먹을 묻혀 하나 찍어내서 전시해야 되는데 일손이 부족하다 하셨다. 재밌을것 같아 한다고 했다. 먹과 벼루와 붓등을 받아와서 일하는곳 앞의 큰 책상에 벌여놓고 먹이 묻을까봐 앞치마도 하고 팔토시도 하고 먹을 갈기 시작했다.
먹을 갈고 있으니 조용하고 평화롭게 먹을 진하게 갈아서 난을 치던 시절이 생각났다. 중학교때 1년정도 난을 쳤었다. 미술실에서 아침에 한시간, 수업마치고 한시간정도 학생 열댓명과 선생님들 몇분이 같이 동양화를 그리고 있었는데 클럽활동은 아니였다. 나는 전혀 할 생각이 없었는데 어머니의 강권으로 가게 되었었다. 미술실에 가서는 조용히 담요와 벼루와 붓 연적 서진 종이등을 챙겨서 책장위에 준비를 한다. 붓과 종이와 먹은 개인이 준비해야 한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벼루와 먹마다 먹물을 갈때 감촉이 미묘하게 다르고 먹색과 질감이 차이가 난다는게 느껴져서 좋은 벼루와 서진을 고르고 고르곤 했었다. 먹은 어째서인지 냄세가 독한게 잘 갈리고 좋았다. 종이는 화방에 가서 각자 사서썻는데 문방구에 파는 화선지하고는 확실히 다르게 먹이 깨끗하게 먹혀서 좋았다. 붓은 토끼털로 된것인가 했는데 한참 쓰다보니 손에 잘 익어서 좋았지만 화방에 갈때마다 괜시히 다른 붓을 탐내고는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림에 조예가 없는건 마찬가지라 난을 한참치고 그다음에 대나무와 국화를 조금 배우다가 3학년이 되어서 입시준비를 하느라 관뒀다. 다른 아이들은 매화까지 다 배우던데 나는 대나무도 어려워서 못하겠더라. 웃긴건 내가 대회에 나가서 상까지 받은 것이다. 우수상인가 하는 상장을 받아들고는 동양화계는 정말 암울하구나..하고 생각했던것과 그렇게 맘에 들게 그리지도 않은 난을 표구를 해서 부끄러웠던게 기억난다. 연필을 잡아도 붓을 잡아도 악필인건 마찬가진데 미술선생님(성격좋아보이는 할아버지)이 내가 낙관한것을 보고는 낙관한번 멋지다 라고 해서 괜시리 기분좋았던것도 기억난다.
목판에 먹을 바르고 화선지를 댄 뒤에 수건으로 살살 문질렀는데 금새 번져버렸다. 먹을 진하게 갈아도 계속 번지는걸 보니 목판인쇄를 하는것과 서예는 하는 것은 먹이 좀 다른가보다. 검색을 해보니 알콜성분을 넣고 먹을 갈아 판에 바른뒤 종이를 대고 사람머리카락에 밀랍이나 기름을 묻혀서 살살 문질러내야 된단다. 서지학시간에 비디오로 볼때는 쉽게 되는것 같더만 책만드는 장인이 보기보다 어렵다고 했던게 빈말이 아니었다.재료도 시간도 기술도 없어서 관두기로 했다. 정리하다가 남은 먹이 아까워서 그림을 그렸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The Ones Who Walk Away from Omelas / 어슐러 K. 르 귄Ursula K. Le Guin
낭랑한 종소리에 제비들이 높이 날아오르면서,
바닷가에 눈부시게 우뚝 선
도시 `오멜라스'의 여름 축제는 시작되었다. 항구에 정박한 배들은 모두
돛에 매인 밧줄마다 깃발들이 나부꼈다. 빨간 지붕에 울긋불긋하게 담장을
단장한 집들과 이끼가 곱게 깔린 정원들 사이로 난 거리를 따라, 길가에
늘어선 가로수 그늘을 거쳐, 넓은 공원과 관청을 지나 축제 행렬이 나아갔다.
빳빳하게 다림질한 자주색이나 회색 예복을
입은 노인들과 엄숙한 표정의
직공장들, 그리고 아기를 안은 채 걸으면서 소곤거리는 수수한 복장을 한
명랑한 여인네들로 이루어진 행렬은 점잖은 축에 들었다. 또다른 거리에서는
징과 탬버린 소리가 뒤섞인 음악이 점차 빨라졌고, 그 음악에 맞춰 사람들이
춤을 추며 나아갔다. 행렬 자체가 춤이었다. 음악과 노래소리를 꿰뚫고
제비가 날아오르듯이 아이들은 높은 소리로 외쳐 대면서 행렬들 틈바구니를
헤집고 돌아다녔다.
모든 축제 행렬은 천천히 굽이치며
도시의 북쪽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푸른 들판' 이라고 부르는 촉촉하게 물기젖은 그곳의 넓은 풀밭에서는,
환한 햇살 아래 벌거벗은 소년 소녀들이 진흙투성이 발을 한 채 길고 유연한
팔로 경주에 앞서 들뜬 말들을 애써 달래고 있었다. 말에는 안장을 얹지도
재갈을 물리지도 않은 채, 단지 고삐만 물려 놓은 상태였다. 여러 갈래로
땋은 갈기에는 은색, 금색, 녹색 리본이 달려 있었다. 말들은 코를 힝힝
울리고 껑충거리며 서로 위세를 뽐내었다. 동물 중 오로지 말들만이 사람들의
축제가 마치 자신들의 것인 양 무척 흥분해 있었다. 멀리 북서쪽으로는 산
봉우리들이 바다의 만 쪽에 위치한 `오멜라스'를 반쯤 감싼 모습으로 솟아
있었다. 아침 공기가 너무나 해맑아서 `열여덟 봉우리' 꼭대기에 녹지 않고
쌓여 있는 눈이 짙푸른 하늘 아래 햇빛을 받으며 몇 마일에 걸쳐 백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경마 코스를 따라 꽂아 놓은 깃발들이
알맞게 불어오는 바람을 받아 이따금
펄럭거렸다. 드넓게 펼쳐진 푸른 풀밭의 고요함 속에서, 도시의 거리를
지나 먼 듯 가까운 듯 조금씩 다가오면서 때때로 흩어지며 다시 모였다가
마침내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즐거운 종소리로 터져 나오는, 대기의 아련하고
달콤한 내음을 담은 음악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즐거워라!
그 누가 이러한 즐거움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누가 `오멜라스' 사람들을 제대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인가?
행복하게 생활한다고 해서 그들은
결코 단순 무지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제 우리는 더이상 그들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그들 얼굴에 퍼졌던 웃음도
이제는 낡은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오멜라스'를 이와 같은 식으로
묘사하면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선입감을 갖게 마련이다. 멋진 종마 위에
올라앉아 고귀한 기사들의 호위를 받거나, 근육질의 노예들이 들쳐 맨 황금
가마에 앉은 왕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오멜라스'에는 왕이 없었다.
그들은 칼을 휘두르지 않았고, 노예를
부리지도 않았다. 그들은 야만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오멜라스'의 법률과 규칙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단지
그런 것들이 유례없이 적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따름이다.
군주제나 노예제를 채택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들은 주식 시장이나 광고, 비밀
경찰, 폭탄 없이도 잘 지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이야기하건대 `오멜라스'
사람들은 단순 무지하지 않았고, 유쾌한 양치기도 아니었으며, 고결한 야만인도
유순한 유토피아 주의자들도 아니엇다. 그들의 세상은 결코 우리들 세상보다
단순하지 않았다. 문제는 우리들이 행복을 어리석은 것이라고 여기는
현학자들과 궤변가들이 부추기는 나쁜 습관에 빠져 있다는 점이다. 오직
고통만이 지적인 것이며 악한 것만이 흥미로운 것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것은 예술가들에 대한 배신 행위에 불과하다. 악덕의 진부함과 고통의
끔찍한 권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에 불과하다. 고칠 수 없다면 차라리
동참하라! 고통스럽다면 반복하라는 식인 것이다. 그러나 절망을 찬양하는
행위는 기쁨을 비난하는 짓이며, 폭력을 용인하는 짓은 그 밖의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는 짓이다.
우리는 이미 갖고 있던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더이상 행복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축복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내가 어찌 `오멜라스' 사람들에 관해서 여러분에게 이렇다, 저렇다
말을 늘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순진하고 행복에 겨운 어린애들이
아니다. 물론 그들의 아이들은 행복하게 지내지만 말이다. 그들은 결코
비참하지 않은 인생을 영위해 나가는 성숙하고, 이지적이며 열성적인 성인들인
것이다. 그야말로 진정 기적과도 같은 일이 아니겠는가! 아아, 내가 그러한
경이로움을 훨씬 더 잘 묘사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여러분을 납득시킬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여러분 귀에는 `오멜라스'가 아주 오랜 옛날,
머나먼 곳에 있었던 동화 속의 도시처럼 들릴 것이다. 물론 각자가 나름대로
상상에 따라 그곳을 마음 속에 그려보는 것이 가장 좋을 수도 있으리라.
왜냐하면 나로서도 여러분 모두를 일일이 만족시킬 만큼 제대로 설명을 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술 문제를 생각해 보자.
그들의 거리에는 자동차가 다니지 않고
헬리콥터 따위도 날아다니지 않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오멜라스'의 사람들은 행복하기 때문이다. 무릇 행복이란, 꼭 필요한 것,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롭지도 않은 것, 그리고 해롭기만 한
것을 확실히 구별할 줄 아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두번째 항목을 생각할
때에 -- 즉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롭지도 않은 많은 것들,
다시 말해서 안락함, 호화로움, 풍요로움 등등 -- 그들은 중앙 난방이나 지하철,
세탁기, 그리고 우리들이 아직 발명하지 못한 그 밖의 굉장한 기구들, 이를테면
공중에 떠다니는 조명등이나 영구 동력 기관, 우리가 흔하게 앓아 눕는 감기의
치료제 따위를 모두 갖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런 것들을 전혀 갖추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런 점들은
여러분 마음대로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오멜라스' 해안 근처에 흩어져 사는
여러 도시 사람들이 무척이나
빠른 자그마한 열차나 이층 전차를 타고 축제일 며칠 전부터 몰려든
`오멜라스'의 기차역은 비록 웅장한 농산물 시장보다는 평범해도 시내에서는
그래도 가장 멋진 건물이라는 것만은 꼭 밝혀 두고 싶다. 기차야 그렇다 치고
`오멜라스'에 대해 지금껏 이야기한 것만으로도 여러분들 중 도덕 군자 티를
내는 몇몇 사람들은 크게 놀라지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즐거운 웃음,
종소리, 행렬, 경주마들, 게다가 어휴...... 만약 괜찮다면 지금까지 말한
목록에다가 북새통의 파티를 하나 더 덧붙여서 생각해도 좋으리라. 북새통의
파티 생각이 `오멜라스'를 눈앞에 그리는 데 도움이 된다면 부디 주저하지
마시기를......
그렇다고 눈부신 나체의 남녀 사제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이미 반쯤은
황홀경에 취해서는, 저 거룩한 피의 신성과 하나되기를 소망하는 사람이라도
남자건 여자건, 혹은 연인이건 낯선 사람이건 간에 가리지 않고 누구하고든지
마구 성관계를 맺으려 드는 사원을 연상하지는 말라. 사실 처음에는 나도 그런
생각을 떠올리기는 했다. `오멜라스'에는 사원이 없다고 하는 편이, 적어도
사람들이 득시글거리는 그런 사원은 아예 없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종교는
있지만 사제 계급은 없는 셈이다. 물론 굶주린 이들에게 성스러운
수플레(달걀 흰자위에 우유를 섞은 다음 거품을 일게 하여 구운 요리)를 주듯이
자신의 아름다운 나체를 즐거움으로 제공하면서 이곳저곳을 거닐 수도
있으리라. 그들도 행렬에 참여케 하자. 교합중인 이들의 몸뚱이 위에서
탬버린을 치고, 징을 울려 욕정의 즐거움을 알리며 다음이야말로 상당히 중요한
점인데 그러한 황홀한 의식 끝에 태어난 후손들을 사랑하고 돌봐 주도록 하자.
내가 아는 한가지 사실은 `오멜라스' 사람들은 아무에게도 죄가 없다는
사실이다.
처음에 나는 `오멜라스'에는 마약이 없는 줄
알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청교도적인 생각일 뿐이었다. 마약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오멜라스' 거리
어디서든지 희미하지만 은은하게 감도는 `드루즈'의 향기를 맡을 수 있으리라.
`드루즈'는 처음엔 몸과 마음을 상쾌하고 맑게 해주고, 이어서 몇 시간 동안
꿈꾸는 듯한 나른함을 안겨 주며, 우주의 가장 깊숙한 신비를 드러내 보이는
황홀경을 경험케 한 다음, 마침내 도저히 믿기 어려울 정도의 터질 듯한 섹스의
즐거움을 선사해 준다. 게다가 `드루즈'는 중독성도 없다.
그러나 보다 소박한 취향을 가진 이들을
위해서라면 맥주가 제격이리라. 이
즐거운 도시에 그 밖에 무엇이, 도대체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물론
전투에서 얻은 승리의 느낌, 용맹스러움에 대한 경의가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성직자 없이도 잘 살 수 있듯이, 우리는 군인 없이도 잘살아 갈 수
있다. 무참한 학살을 통해 얻는 즐거움은 올바른 즐거움일 수 없으며, 그런
식으로는 진정한 즐거움을 얻을 수도 없다. 설령 즐거움이 있다손 쳐도 그것은
무서운 것일 뿐이며 그러한 즐거움의 크기 역시 미미하기 짝이 없을 뿐이다.
한량없이 관대한 만족감, 이 세상 모든 이들의 영혼 속에 살아 있는 가장
고결하고 공명 정대한 부분들과의 교감, 그리고 이 세상의 여름이 내보이는
위용! 그런 것들이야말로 `오멜라스'의 사람들 가슴 속에 풍기는
향기로움이며, 그들이 축복해 마지 않는 승리야말로 그러한 향기를 내뿜는 삶인
것이다. 그들 대부분에게 `드루즈'가 필요하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이다.
이제 행렬들 대부분이 `푸른 들판'에 도착했다.
들판 한쪽에 세워진
빨간색과 파란색의 천막에서 맛잇는 요리 냄새가 퍼져 나온다. 자그마한
어린이들의 귀여운 얼굴은 끈적끈적한 과자 부스러기가 묻어 있다. 소년
소녀들은 제각기 말에 올라타서는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출발선에 정렬한다.
작고 뚱뚱한 한 노파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바구니에서 꽃을 한 송이씩 꺼내어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훤칠한 젊은이들은 그 꽃을 자신들의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에 꽂는다. 모여 있는 사람들의 한쪽 끝에는 아홉이나 열 살쯤
먹었음직한 아이가 혼자 앉아서 나무피리를 분다. 사람들은 멈춰 서서 귀를
기울이고 미소를 짓지만 아무도 그 아이에게 말을 걸지는 않는다. 쉼 없이
연주를 계속하는 아이의 검은 눈은 달콤하고 여린 마술과도 같은 피리소리에
깊이 빠져 들어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는 마침내 연주를 마치고 피리를 든 손을 천천히 내린다.
아이의 오붓한 침묵이 신호가 된 양
출발선 가까이에 있는 관람석에서 애조를
띤 우렁찬 나팔소리가 급박하게 울려 퍼진다. 말들은 늘씬한 뒷다리로 뛰어
오르거나 울음소리로 대답한다. 기수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말의 목덜미를
토닥이고 달래면서 속삭인다.
"진정하렴, 진정해. 사랑하는 말아......"
그들은 출발선에 나란히 정렬하기 시작한다.
경주 코스를 따라 몰려 있는
사람들이 마치 들판에 핀 채 바람에 흔들리는 수풀이나 꽃처럼 보인다. 마침내
`여름 축제'가 시작된 것이다.
여러분은 내 이야기가 믿어지는가?
축제와 도시, 그리고 온갖 즐거움에 관한
나의 설명에 수긍이 가는가? 아니라고? 그렇다면 한 가지 더 이야기하기로
하자.
`오멜라스'의 아름다운 공공 건물들 중
한 군데의 지하실에는 방이 있다.
아니면 어느 널따란 개인 저택의 지하실일 수도 있다. 그 방에는 굳게 잠긴
문이 하나 있을 뿐 창문도 없다. 지하실에 달린 거미줄투성이의 창문으로 새어
들어온 한 줄기 희미한 빛이 그 방 판자벽의 갈라진 틈을 따라 날리는 먼지를
빼꼼이 비출 뿐이다. 그 작은 방의 한쪽 구석에는 덩어리지어 엉긴 채
딱딱하게 굳어서 악취를 뿜어 대는 자루걸레 두어 자루가 벽에 기대어 서 있고,
그 옆에는 녹슨 양동이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다. 바닥은 몹시 지저분하고
습기가 차서 축축한 것이 여느 지하실 창고와 다를 바 없다. 폭이 세 걸음에
너비는 두 걸음 정도인 방은, 청소 도구들을 넣어 두는 벽장이나 쓰지 않는
연장을 처박아 두는 다락에 불과하다.
그 방에 어린아이 한 명이 앉아 있다.
남자아이일 수도 있고 여자아이일
수도 있다. 겉보기에는 여섯 살쯤 되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의 열 살쯤
먹었다. 그 아이는 정신박약아이다. 태어날 때부터 문제가 있었는지도
모르고, 공포와 영양 실조 때문에 점점 우둔해져서 마침내 버림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는 녹이 슨 양동이와 자루걸레에서 떨어진 곳에 구부정하게 앉은
채로 이따금 자기 코를 쥐거나 발가락 또는 생식기를 더듬더듬 만지작거린다.
아이는 자루걸레를 무서워한다. 자루걸레들이 무시무시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눈을 꼭 감아 보지만 자루걸레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고, 문은
굳게 잠겨 있으며, 아무도 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다가 아주 가끔씩 -- 아이는 그때가 언제인지
혹은 그 간격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 -- 문이 요란스럽게 흔들리다 열리고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이 문간에 나타날 때가 있다. 그 중에는 방안으로 들어와서 아이를 발로
차 일으키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코 아이에게 가까이 가지
않는다. 단지 놀랍고 메스꺼운 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할 뿐이다. 서둘러서
밥그릇과 물주전자가 채워지고 나면 문은 다시 굳게 잠기고 들여다보던 눈들도
사라진다. 문간의 사람들은 결코 입을 여는 법이 없지만, 내내 지하실에서
갇혀 있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밝은 햇빛과 엄마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는 그 아이는 이따금 말을 한다.
"전 좋아질 거예요!"
아이는 말하곤 한다.
"절 내보내 주세요. 전 다시 좋아질 거예요!"
결코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는다.
아이는 밤이면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크게 소리내어 울기도 했지만 지금은 단지 `으어어, 으어어'하는
일종의 신음 소리만 낼 뿐이며 그 소리마저 점차 뜸해져 간다.
너무나도 야윈 아이의 장딴지에는 살이라곤 아예 없고, 배만 불룩
튀어나왔다. 아이는 기름과 옥수수가루 반 그릇으로 하루를 연명한다. 아이는
벌거벗은 채이다. 자신의 배설물 위에 계속 앉아 있었기 때문에 엉덩이와
허벅지는 짓무르고 헐어서 상처투성이다.
`오멜라스' 사람들은 아이가 그곳에 있음을
모두들 알고 있다. 직접 와서 본
사람도 있고, 단지 그런 아이가 있다는 사실만 아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왜 그곳에 있어야 하는지 모든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지만, 자신들의
행복, 이 도시의 아름다움, 사람들 사이의 따뜻한 정, 아이들의 건강, 학자들의
지혜로움, 장인들의 기술, 그리고 심지어는 풍성한 수확과 온화한 날씨조차도
전적으로 그 아이의 혐오스러울만큼 비참한 처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오멜라스'의 아이들은 여덟 살 내지 열두 살쯤 되면,
그러니까 말귀를
알아들을 만한 나이가 되면 그 사실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된다. 지하실의
아이를 보러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이들이지만, 때로는 나이 든 어른이
오기도 하며, 한번 더 보려고 다시 오는 이들도 꽤 있다. 아무리 설명을
그럴듯하게 들었다고 해도 젊은 구경꾼들은 그 광경을 보고는 언제나 충격을
받고 가슴 아파한다. 자신들이 그 아이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동안 전해 들었던 모든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화를 내고, 분노를 느끼며, 무력감에 빠져든다. 그
비참한 아이를 위해서 뭔가 해주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물론 아이를 그 지독한 곳에서 밝은 햇살이
비추는 바깥으로 데리고
나온다면, 아이를 깨끗하게 씻기고 잘 먹이고 편안하게 해준다면 그것은 정말로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한다면, 당장 그 날 그 시간부터
지금껏 `오멜라스'가 누렸던 모든 행복과 아름다움과 즐거움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계약인 것이다. 단 한가지의 사소한 개선을 위해서
`오멜라스'에 사는 모든 이들이 누리는 멋지고 고상한 매일매일의 삶을
맞바꾸어야만 한다는 것, 한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수천 명의 행복을 내던져 버려야 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하실 안에서
벌어지는 죄악을 방기하게 만드는 이유인 것이다.
계약은 엄격하며 절대적인 것이다.
그 아이에게는 친절한 말 한마디조차도 건네면 안된다.
그 아이의 모습을 보고서 이러한 끔찍한
모순에 직면했을 때, 대개의
젊은이들은 눈물을 흘리거나, 혹은 눈물도 나지 않을 만큼 화가 치밀어서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고는 몇 주일 혹은 몇 년씩 그 아이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은 설령 그 아이를 풀어 줄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약간 더
따뜻해지고, 약간 더 많은 음식을 먹게 되더라도 아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아주
조금밖에 즐거워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기쁨을 알기에는 너무나
퇴보했고 우둔해진 것이다. 더욱이 그 아이는 너무나 오랫동안 자유로워지는
것을 두려워해 온 것이다. 너무도 황량하게 지내 왔기 때문에 인간적인 대우에
제대로 반응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그런 상태로 지내
왔기 때문에 아이를 보호해 주고 있는 벽과, 그 아이의 눈에 익숙해진 어둠과,
깔고 앉은 배설물이 사라진다면 오히려 더욱 비참하게 느낄 것이다.
그 아이에 대한 의롭지 못한 행위에
가슴 아파하면서 흘리던 눈물은 현실이
보여 주는 이토록 끔직한 정의를 알아차리고 수긍하기 시작할 때면 메말라
간다. `오멜라스' 사람들의 빛나는 삶의 원천이야말로 그들의 눈물과 분노,
관용을 베풀려는 의도, 그리고 무력한 수긍에 있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김 빠지고 무책임한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지하실의 아이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들도
연민이란 것을 알고 있다. 고상한 취향으로 지어진 건축물들, 심금을 울리는
음악, 심오한 과학을 가능케 하는 그 모든 것들이 바로 그 아이의 존재
때문이며, 또한 그들이 그런 아이가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아이들에게 그토록 자애롭게 대하는 것도 바로 그 아이
때문이다.
만약 그 아이가 어둠 속에서 코를 훌쩍이며
비참하게 앉아 있지 않다면,
피리를 불던 아이는 더이상 즐거운 음악을 연주할 수 없을 테고, 또 다른
아이들이 말 잔등에 보기 좋게 올라탄 채 여름날 첫 아침의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경주를 벌이려 줄지어 서 있을 수 없음을 그들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제 여러분은 그들에 관한 이야기가 믿어지는가?
이제는 좀 더 납득이
가는가? 그러나 아직도 할 이야기가 하나 남아 있다. 이 이야기야말로 진정
믿기 어려운 일이다.
이따금씩 지하실의 아이를 보고 난
청소년들 중에는 눈물을 흘리거나 분노에
찬 채로 그냥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들이 있다. 실제로 그들은 결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때때로 좀더 나이든 남자나 여자들도 하루 이틀쯤 침묵에
잠겨 있다가는 집을 떠난다. 그들은 길로 나가서는 거리를 따라 홀로 걸어
내려간다. 그들은 한참을 걸은 끝에 `오멜라스'시의 아름다운 입구를 곧장
빠져나간다. `오멜라스'의 농장들을 가로질러 계속 걸어간다. 소년이건
소녀건, 나이든 남자건 여자건 간에 모두들 혼자서 간다.
밤이 찾아오면 그들은 마을의 한 길을 따라,
창문에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는 집들 사이를 지나, 들판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 간다. 그렇게 그들은
혼자서 서쪽으로, 아니면 산맥을 향해 북쪽으로 간다. 그들은 계속 걸어간다.
그들은 `오멜라스'를 떠나 어둠 속으로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이
가는 곳은 우리들 대부분이 이 행복한 도시에 대해 상상하는 것보다 더
상상하기 어려운 곳이다. 나는 그곳을 결코 제대로 묘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곳이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가고자 하는 곳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우경과 남포동 마실을 갔다. 지하철에서 대삼방 을 만났다. 셋이서 붙어다니는 신입생 트리오인데 세명을 통칭하는 말이 없냐고 물어보니 '돼지삼인방요?" 이런다. 그건 너무했다 싶어서 대삼방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과제를 위한 견학을 위해 남포동에 가는 길이란다. 얘들과는 어째서 이렇게 자주 마주치는것일까. 화요일에 점심을 사주기로 했다.
카메라 상가에 잠시 들러서 렌즈가격에 좌절하고는 용두산 공원에 올라가봤다. 사람이 많았는데 조선통신사 기념 퍼레이드가 있다고 했다. 행사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구경 하면서 사진좀 찍었다. 일본사람이 많아서 곳곳에서 일본어가 들려왔다. 행사시작이 세시라 기다리기 뭣해서 다른데를 둘러보기로 했다. 공원을 내려가는데 사무라이 복장을 한사람들이 공원을 올라오고 있었다.
수입상가에 들러서 MRE세개와 이과수커피 세통을 샀다. 이동네 사람들은 여전히 무섭다;; 보수동책방골목에 가서 고로케와 도너츠를 사먹으며 쉬었다. 가게에는 손님이 끊이질 않았고 주인 아저씨는 귀에 이어폰을 꽂은채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고 반죽을 하고 있었다.
늘 가는 곳에서 책을 세권 샀다. 기형도 시집을 사고 싶었는데 갑자기 '기형도' 라는 이름이 생각이 안났다. 도구와 기계의 원리 1권이 있었다. 내가 예전에 찾은적이 있었는데 주인아저씨가 기억해뒀다 찾아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