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자신답게 살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사는 생활은 참으로 경계해야 할 것이니..
물처럼 사는것이 좋지만 때때로 물길을 터주지 않으면 물길은 마르거나 막혀버린다.
틈틈히 읽고 있는 마루쿠스 아우렐리우스 의 명상록에서 하나 가져오자면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라. 당신을 지배하는 이성은 바르게 행동하고, 그리하여 마음의 평정을 얻으면 스스로 만족한다 -7장 우주에 본질에 관한 명상, 27
하나 더,
당신이 소유하지 않는 것을 탐내지 말라. 그것보다는 당신이 현재 소유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만일 이것조차 없었다면 이것을 얼마나 원했을까를 생각하라. 그렇지만 소유한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과대평가한 나머지,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상실했을 때 괴로워 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 -7장28
지금의 카메라구입을 위한 절약은 가지고 있던 카메라에 만족하려고 위와 비슷한 생각을 수백번 넘게 하며 몇개월을 고민한 결과이다. 2001년도에 구입한 올림푸스 C2040z은(별다른 애칭이 없이 그냥 카메라였다)렌즈 밝고 사진 잘나오고 나름 컴팩트하고 내 손에 익은 최고의 카메라지만 아무리 새 건전지를 넣어도 서른장쯤 찍으면 방전되버리니 어쩔수 없다.
추석연휴를 맞아 도서관이 전산시스템 교체와 점검에 들어갔다. 당연히 홈페이지 접속도 안되고 자료검색도 안된다. 웹DB도 사용할 수 없다. 연휴가 끼인 오늘과 모레는 문을 열기는 해도 대출도 안되고 반납도 안되니 대출/반납데스크에서 일하는 사서들은 연가를 낸 사람도 있다. 하지만 열람만은 가능하다. 정말 급한 사람(이책을 빌려서 연휴기간동안 읽지 못하면 그것이 평생의 한으로 남을것같다고 주장하는)을 위해서 모처럼이니 장부에 적던가 해서 수동대출도 해줬으면 더 좋을것 같기도 하다. 요즘은 형식상 붙이는 반납일 표시 종이에도 몇글자 쓸 수 있고..
작업기간내의 반납도서는 전부 연휴이후로 반납기한이 연장되어서 왠지 이득보는 기분이기도 하다. 지금 도서관은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지난번에 진주집에 갔을때 아버지께서 쓰시다가 장농속에 고이 모셔둔 소위 장농카메라를 가지고 왔었다. 예전에도 한번 다뤄보려고 시도를 했었지만 카메라에 대한 지식이 전무해서 두어롤 찍고 신통찮은 결과에 방치해뒀었는데, 약간 공부를 하고 난 후 새삼 필름카메라를 다뤄보고 싶어져서 이것저것 살펴보니 쓸만한 것 같아서였다. 표준렌즈라 렌즈도 밝고, 줌은 없지만 내가 더 움직이면 될것이고(브레송은 표준렌즈 하나만으로 작업을 했다는 것도 큰 요인) 좀 크고 무겁지만 그것도 마음에 들었다. 이 독일에서 만들어진 익숙하지 않은 메이커의 카메라에 대해서 궁금해져서 검색을 해보았다.
프락티카 MTL5b는 MTL50와 기본적으로 동일한 카메라입니다. 단, MTL50에는 미터정보가 LED로 표시됩니다. 1985년에 생산개시되었으며(두 카메라 모두), 통칭 프락티카 B시리즈로 불리는 베이오넷 마운트 모델들(MTL이 기계식 셔터인데 반해, 전자셔터를 채용하였으며, 당시 일본의 카메라회사들의 경향을 좇아, 금속제 대신 합성수지를 카메라외장으로 채택)과 동시에 생산되었읍니다.
프락티카 카메라를 생산하던 펜타콘 인민공사는 통독후 자본주의 시스템내에서의 독자 생존에 실패, 서독에 기반을 두고 있던 슈나이더 옵틱에 합병되었으며, 현재에도 프락티카 브랜드의 포인트 앤드 슛 카메라들과 망원경등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펜타콘의 의미는 펜타프리즘 콘탁스의 준말로서, 당시 서독으로 탈출한 짜이스 이콘사의 임원들이 서독에 짜이스 이콘사를 다시 설립하고 유명한 짜이스의 브랜드이던 콘탁스 카메라를 생산하게 되자, 동독의 짜이스 이콘과 상표권 소송에 휘말리게 됩니다. 결국 동독측이 서구에서 패소하게 되어, 콘탁스란 이름의 권리를 잃고 자사 카메라에 펜타콘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SLR을 생산하게 된것이 유래입니다. 어쨌든 서독에서 전전 짜이스의 이름을 이은것이 칼 짜이스 재단과 짜이스 이콘사라면, 동독에선 짜이스 이콘을 중심으로 합병하여 설립한 펜타콘 인민공사라고 할수 있습니다. 서독의 짜이스 이콘은 1972년 칼 짜이스 재단차원에서 카메라 제조사업의 철퇴를 결정, 회사가 사라지게 되고, 대신 칼 짜이스 재단은 렌즈의 제조와 디자인에 주력하여, 현재 세계굴지의 광학전문 기업군으로 자리잡게 된 초석을 마련하게 되고, 소송의 대상이 되기까지 했던 유명한 브랜드 이름 콘탁스는 일본의 야시카사에 인도 되어, 현재도 일본에서 콘탁스브랜드의 카메라들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브랜드의 소유권은 칼 짜이스에 있습니다. 일본제 콘탁스의 사촌쯤이 프락티카라고 할수있겠습니다.
-www.buycamera.co.kr
집에 있던 필름을 힘들게 넣고 이것저것 한롤을 찍었는데 필름감을때 버튼을 누르지 않아서 필름이 끊어져버린것 같다. 거기다가 갑자기 상태가 안좋아서 카메라를 살짝 열어봐서 필름이 타 버렸다.
거기에서 크게 좌절하고 몇주정도 카메라를 방치해두다 어제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사진관에서 가서 몇장이라도 건질수 있는가하고 물어봤는데 안쪽의 것은 괜찮을지도 모른단다. 현상하고 괜찮은 것은 인화도 부탁했다. 노출계에 넣는 배터리도 사고,200감도의 필름도 한통 샀다.
결과물은 집에 있던 필름이 좀 오래되서 그런가 색이 전체적으로 조금 연한 느낌, 뚜껑을 열어서 부분적으로 탄것 같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초점이 잘 안맞았다. 조금 익숙해지면 괜찮아질것 같다.
부산대학내에서 발행한 학술잡지의 기사MARC입력확인을 하고 입력되지 않은 권수의 입력했다. 겨울에 사서실습을 할때 한번 해보기는 했지만 막상 하려니까 헷갈려서 토요일에는 거의 입력을 못했지만 기억이 돌아오고 익숙해져서 오늘은 두시간동안 일곱건을 입력할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수 있겠지..
남은 시간에는 음성학 자료를 찾았다. 괜찮은 자료를 찾아서 다행이다. 일본어학개론을 가르치는 교수는 판서하기 힘들다고 파워포인트를 준비해와서 수업을 한다. 필기할것이 너무 많고 내용은 어렵고 해서 필기 하면서 수업듣기가 힘들어서, 파워포인트를 출력해서 보게 파일을 달랬더니 반응이 미심쩍었다. 그 다음시간에 한번 더 부탁하니 수업자료는 공개하기 싫단다. 그러면서 다른 학생은 아무 말 않고 있는데 왜 혼자 그러냐고 뭐라고 한다. 머리속에서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고, 다음시간부터는 디지털 카메라를 준비해 가기로 했다.
홍당무야
오늘 아침에 너의 편지를 받고 상당히 당황했다. 몇 번씩 읽어 보았지만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다. 평상시의 네 문장과도 다르고 그 내용도 이상야릇해서 아무리 봐도 내가 썻다고 생각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항상 너는 잡다한 일들을, 이를테면 성적이라든가 선생님들의 좋은 점과 나쁜 점, 새친구의 이름, 내의가 어쩌니저쩌니, 잠을 많이 잤느니 못 잤느니 밥맛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들을 썻었지 않니?
사실 내가 알고 싶은 일은 바로 그런 일이다. 그런데 오늘 편지는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왜 이 추운 겨울에 봄 이야기를 했니? 도대체 무슨 뜻이지? 혹시 목도리가 필요한 것 아니냐? 날짜도 적지 않았고, 나한테 보낸 것 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한테 보낸 것인지 조차도 쓰지 않았더구나, 글씨체도 다른 때하고 다른 것 같고 행수라든가 대문자 수도 달라서 그저 어리벙벙할 뿐이구나. 보아하니 장난을 친 것 같은데 그렇다면 놀림을 받는 것은 바로 네가 될 것이다. 나는 너를 꾸짖고 싶은 생각은 없다만 그래도 주의는 주고 싶구나.
너를 사랑하는 아빠로 부터
홍당무의 답장
아빠
요전번의 편지에 대해서 우선 말하겠습니다.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그 편지는 <시>를 적어서 보냈던 것입니다.
자갈치역에서 수현이(사촌동생)을 만나 출발했다. 오랫만에 남포동 구경을 한것은 좋았으나 가는 방향을 잘못 잡아서 그 일대를 한바퀴 헤메고 나서 결국 택시를 타고 갔다.
행사기간이라서 그런지 저녁8시에도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공연소리를 들으며 여기저기 구경을 하다가 제일 괜찮은 가게에 들러서 몇권샀다. 좀 더 살게 눈에 띄었는데 돈이 없어서 문화상품권밖에 없다고 친척동생에게 우는 소리를 하자 아저씨께서 문화상품도 받아주신단다. 헌혈하고 받은 3000원짜리 문화상품권이라서 문고판소설 세권을 골라서 계산하니 덤으로 두권 더 가져가라고 하셨다.
편집부,알기쉬운 역사철학(한울,1984)
務臺理作무다이 리사쿠, 홍윤기 옮김,철학개론(한울,1982)
Antoine-Marie-Roger de Saint-Exupery,어린왕자(시사영어사 영한대역,1990)-세권에 오천원을 부르셨다가 조금 주저하는것 같자 바로 사천원으로 깍아주셨다.
Jules Renard쥘 르나르,홍당무(글방문고,1989)
Ivan Sérgeyevich Turgenev투르게네프,첫사랑/사냥꾼일기,(글방문고,1990)
Françoise Sagan,프랑수와즈 사강,슬픔이여 안녕(글방문고,1986)-가지고 있지만 한권더 구입,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도 실려있다.
William Somerset Maugham서머셋 모움,인간의 굴레(상,하)(글방문고,1991,1986)-덤
일본어회화수업 교수님(일본인이다)께서 연습에 따른 일본어읽기와 관련된 조사를 수강생들에게 부탁했는데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시간도 그렇게 걸리지 않고 왠지 재밌을것 같기도 해서 한다고 했었다. 그런데 첫번째 일을 하고 나니 소정의 감사비를 주는것이었다. 지금까지 두번 했는데 정말 간단한 일이다.
1.적당한 시간에 연구실을 방문한다.
2.마이크를 착용하고 준비된 일본어 뉴스 스크립트를 읽는다. 네줄 정도 밖에 안되는 두개의 스크립트를 잘 읽고 못읽고는 상관 없이 그냥 열심히 읽으면 된다. 이 스크립트는 수업시간에도 읽는것이라 두번째로 읽을때는 더 잘 읽을 수 있다.
3.아르바이트비를 받고 나온다.
목
1층 데스크의 연장근무 당직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식사를 하는동안 잠시 자리를 맡아달라고 하셨다. 1층 데스크라면 도서관의 얼굴! 약간 설레이긴 했지만 사람 안오는 시간인걸 알고 있었기에 느긋하게 앉아서 책을 읽으려고 하는데..갑자기 전화가 왔다. 받고 나니 누가 학생증을 두고 와서 수동대출을 해달란다. 오랫만에 해봐서 무지 헤메면서 잠깐 자리를 맡고 있는거라고 열심히 해명했다. 그 와중에 전화가 왔다. 상호대출 담당자가 퇴근했으니 내일 아침에 전화하라고 했다. 또 전화가와서.. 항상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되는것이다.
눈이 일찍 떠졌다. 첫날부터 제법 달린데다가 딱딱한 찜질방 수면실 바닥에 아무것도 안깔고 자서 그런지 몸이 찌뿌둥했다. 채비를 하고 나섰는데 배가 너무 고파서 근처의 김*천국에서 라면과 김밥으로 요기를 했다. 근처에 있는 도서관 구경을 하려고 했지만 개관시간이 한시간이나 넘게 남아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경주도서관은 황성시민공원과 이어져있는 멋진 기와지붕건물인데, '평지'에 '공원옆'에 도서관이 자리잡고 있다는것이 제일 맘에 들었고 또 도서관앞에 죽 세워져 있는 자전거들과 자전거펌프가 맘에 들었다. 우리나라 도서관들은 어째서 한적하고 전망좋은곳에 자리잡고 있는지..역에 들러 관광지도를 얻어서 오늘 코스를 점검하고 첨성대 주변을 잠깐 둘러보았다.
시가지를 달리는데 갑자기 보이는 이름 없는 고분.. 너무나 경주다운 모습에 한참을 바라보았다.
천마총근처 기와지붕집 담벼락의 그림, 기와관리가 잘 되어있고 같은 그림들이 간간히 보이는걸로 봐서 시에서 관광지주변의 집들을 손 본거겠지. 경주에는 그렇게 높은 건물이 없었다. 역 주변의 시가지에도 그렇고 관광지 주변은 더욱 더. 경주가 더 발전하지 않는 이유가 땅만 파면 유적이 나와서 그렇다던데 정말 곳곳에서 발굴조사가 한창이었다. 경주시민들께는 미안하지만 나는 지금의 경주가 딱 좋다. 낮은 지붕, 구불구불한 골목, 생활속에 있는 1000년전의 흔적..
첨성대를 보았다. 어릴적에 부모님들과 같이 왔던것이 아직도 기억나서 그런지 왠지 나이 든 모습이었다. 들어가려다가 입장료도 있고해서 담너머로 살짝 훔쳐만 보았다. 첨성대의 역할에 관해서는 아직도 여러가지 설이 많은데, 저렇게 보고만 있어도 좋은 이쁜 모양이라면 어떻게 사용했던지 다들 즐겁게 첨성대를 사용했을것 같다.
보문호쪽으로 향했다. 보문호수 아래쪽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왠지 길이 좀 힘들고, 보여야할 건물이 안보이고. 호수가 왼쪽에 나타나지 않는다 싶더니 오른쪽에 호수가 펼쳐졌다. 위쪽으로 돌아왔구나싶었다. 분명히 확실히 길을 따라왔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위쪽으로 돌아온건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호수를 지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엄청난 오르막길의 연속인데 피로가 덜 풀려서 제법 힘이들었다. 언제 오르막이 끝날지 모를것 같아 길가의 포장마차에서 잠시 쉬었다. 물을 좀 얻고 처음으로 칡즙을 마셔봤다. 쓰고 흙냄새가 좀 났지만 싫지않은 맛이었다.
터널을 통과하여 평지를 얼마간 더 달린뒤 골굴사에 도착했다. 절벽을 깍아만든 불상과 동굴안의 동굴속의 불당을 보고 물을 좀 마시고는 쉬었다. 템플스테이중인 외국인과 나란히 앉아서 약간 대화를 나누고는 함께 절집 개를 지켜보았다. 쟤들은 뭘먹고 살까, 절집개라서 그런지 되게 얌전하구나, 점심은 어떻게 먹지 등을 생각하면서 쉬었다.
마음에 드는 길을 달려서 조금만 더 가니 기림사였다. 아침에 돈을 인출하는걸 깜빡해서 수중에는 몇백원밖에 없는데 입장료는 2000원정도 해서 매표소에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그냥 들어가게 해주셨다.
부처님이 수련했던 기원정사의 숲(기림)을 딴 기림사는 유서깊고 보물도 많아 규모가 제법 큰 편이었지만 추천해준 친구의 말처럼 한가로운 느낌이 무척 았다.(절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찬찬히 둘러보고 싶었지만 배가 무척 고팟기때문에 스님을 붙들고 점심공양 한끼 얻어먹을수 있을까 하고 여쭈었더니 저어쪽-공양간에서 알아서 먹으라신다. 단체 관광객들 사이에 슬쩍 끼어서 밥을 먹고는 기분좋게 절간을 거닐었다.
절을 나오니 졸음과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벤치에 누워 잠시 눈을 붙였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뭐라고 한마디씩 하는것 같았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달게 잔뒤 기운차게 출발! 하려고 했으나 자고 일어난 뒤라 그런지 배가 고팟다. 밥먹은지(그것도 두그릇가득) 한시간도 안 지났는데..할수 없이 양갱을 하나 먹었지만 계속 허기가 졌다. 그래도 경주까지 어떻게든 가보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저 멀리 자그마한 간판이 보였다. 옛날 찐빵,만두 5km. 자전거 여행을 떠나서야 국도변에 손짜장가게와 찐빵가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몸으로 깨달을수 있았다. 항상 배고픈 자전거여행객에게 합리적인 가격의 손짜장가게와 찐빵등의 행상들은 치명적인 유혹이다. 4km...3km..2km..1km..여기까지는 버틸수 있었다. 하지만 200미터 단위로 간판이 나오기 시작한 순간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했다. 남은 동전들을 다 뒤져보니 천원조금 넘게 나왔다. 2000에 6개파는 찐빵을 1000원어치 사서 두개는 먹고 하나는 나중을 위해 남겨두었다.
삼선도아니고삼촌도아닌삼손,경주변두리의가게
배도 부르고 느긋하게 달려가는데 허브랜드란게 보였다. 지도에는 안 나오는 곳이였다. 대중교통으로 다녔다면 있는 줄도 몰랐겠지. 슬슬 오르막도 나올것 같아서 한창 더울 시간도 피하고 구경도 할 겸 들렸다.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더운 시간을 피한다고
들렀지만 가족관광객들과 커플들의 천국에서 쫄바지에 쫄티를 입을 사람이 혼자서 버티기는 쉬운일이 아니였다. 그래서 적당히 쉬었다고 생각하고 출발하며 시간을 봤는데 오후 2시,가장 더울시간이다-_- 거기에 처음으로 넘어보는 엄청난 언덕길. 학교뒤의 금정산성가는길은 비교도 안되는것 같다. 노래도 불러보고 욕도 해보다 결국에는 나를 탓했다. '겨우 이정도 고갯길에서 힘들어하면서 여름에 강원도에 갈생각을 했더냐..'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곳에서는 절대 자전거를 끌지 않는다는 여행신조를 지키느라 몇번 쉬긴했지만 그럭저럭 산등성에 오를수 있었다. 좀더 달리니 석굴암과 불국사로 나뉘는 길 윗편에 정자가 있어서 잠시 쉬려고 올라갔는데 이미 관광객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래도 들어가서 한자리 잡고 물을 마시고 있으니 내가 자전거를 타고 오는 걸 본 어르신들이 회를 권한다. 당연히 사양 않고(노렸습니다-) 먹고 소주도 한잔 마시고 어르신들의 소시적 여행이야기도 들어드리고.. 배도 든든하게 잘 쉬었겠다, 석굴암으로 향하는데 앞에 져지를 입고 자전거를 탄 사람이 보였다. 여행객인가 싶었는데 그냥 운동하러 온 사람이었다. 먼저갑니다-하고 가볍게(사실은 조금 힘들었..) 추월해주었다.
석굴암은 비쌋다. 입장료가 4000원이나 하다니.. 어차피 돈도 없었서 그냥 돌아갈까 하다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표 받는 아저씨게 이러저러하다고 설명을 드렸더니 살짝 들여보내주신다. 사람많은 길을 슬슬 걸어서 석굴암에 올랐다. 석굴암앞에서는 문화재 해설사가 입심좋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보존창 앞에도 사람이 잔뜩있었다. 어릴적에 왔을때의 기억은 잘나지 않았지만 왠지 그때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창앞에 서서 십분정도 불상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보면 볼수록 멋지다는 생각이 들어 소름이 돋았다. 합장을 세번하고 뒤돌아보지 않고 자전거로 갔다. 표받는 아저씨께 고맙다고 양갱을 하나 드리고 불국사길로 향했다. 구불구불한 내리막길을 한참 내려오면서 브레이크가 다 닳지 않을까 하고 걱정을 했다. 불국사에 들어가려는데 역시 입장료가 있었다. 요령도 붙고 해서 한번더 들여보내달라고 부탁 할까 하다가 저녁도 먹어야 되고 잘곳도 찾아야 해서 근처 민박촌으로 내려가서 돈을 찾았다. 민박하시는 아주머니께서 묵어가라 권했지만 비싸서 그냥 찜질방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한참 경주쪽으로 달리다 보니 불국사 생각이 났다. 불국사 가려고 돈 찾아놓고서는..
처음 경주올때 봤던 광고영상박물관이 보여서 들렀다. 입장료가 없다는말에 즐거웠다. 다시다 광고를 맡고있는 감독이 관장이고 경주대학에서 운영하는 곳이라는데, 하나의 광고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그대로 재현해서 보여주는것이 이해하기 좋고 알찬 구성 이었다.
저녁은 사치를 좀 부리기로 했다. 불국사 근처에서 아이스크림 팔던 아저씨에게 경주에서 맛있는 가게를 물어봤었는데 천마총 근처의 쌈밥가게와 해장국거리의 해장국이 그렇게 맛있댄다. 저녁은 쌈밥, 내일 아침은 해장국으로 정하고 쌈밥가게를 찾아갔다. 구로쌈밥과 삼포쌈밥이 유명하다는데 구로쌈밥은 한명은 안된다고 해서 삼포로 갔다. 주문하고 앉았는데 뭔가 혼자 먹기 미안할 정도로 많이 나온다. 그래서 즐겁게 천천히 꼭꼭 씹어 거의 다 먹었다.
어디에서 잘까 잠시 생각하다 그냥 어제 잤던곳에 다시 가기로 했다. 카운터 직원이 나를 알아보고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한가한 금요일 오후였다. 오랫만에 만난 친구와 점심을 맛있게 먹고 집으로 왔다. 게임이라도 잠깐 하려고 했으나 쏟아져내리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이불만 둘둘 감은채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잤다. 자다 깨어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알바시간이 다 되었지만 배가 별로 고프지 않아서 요기도 하지 않고 집을 나섰다. 이맘때면 찾아오는 천식때문에 가슴이 아파 먹을 엄두도 나지 않았다. 급하게 움직여서 숨이 찻다. 그냥 참아볼까 하다가 결국 기관지확장제를 한번 들이마시고 학교를 향해 올라갔다. 평소 같으면 자전거를 타고 가볍게 올랐을 길이지만 각오를 단단히 하고 올라야하는것이다.
매일 올라가는 길이지만 오늘은 좀 이상한 풍경이였다. 아침인지 저녁인지 구분이 안가는 그런 가을비속에서 제각기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우산을 쓴 사람들이 위에서 아래로 자꾸자꾸 떠내려왔다. 나는 가빠지려는 호흡을 참으며 한걸음한걸음에 집중하며 그들을 거슬러 올라갔다. 내가 만약 누군가 한명이라도 지금 내가 보는것과 같은 풍경을 떠올리게하고 나와 같은 기분을 느낄수 있게 하는 글을 쓸수 있다면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따위를 하며 길을 올라갔다. 물른 그런일은 없다.
Whatever you want from me, whatever you want I'll do
Try to squeeze a drop of blood from a sugarcube
Try to be more assured, try to be more right there
Try to be less uptight, try to be more aware
Whatever you want from me, is what I want to do for you
Sweeter than a drop of blood from a sugarcube
And though I like to act the part of being tough
I crumble like a sugarcube for you
Whatever you want from me, whatever you want I'll do
I will try
+
I will try
이 짧은 가사는 언제나 가슴깊이 와 닿는다.
의미뿐만 아니라 자음과 모음의 조합으로 인한 울림과 모양 전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