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ashing Pumpkins- Original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에 수록
Smashing Pumpkins- 1996 MTV Music Awards Live
Lollapalooza Music Festival Chicago, 2006 - August 4
Covered By Panic! At The Disco
Tonight,Tonight + There's a Good Reason These Tables Are Numbered Honey,
You Just Haven't Thought Of It Yet
처음보는 밴드지만 나름 괜찮고 총각 얼굴하나 잘 생겼다~
가사
Time is never time at all
You can never ever leave without leaving a piece of youth
And our lives are forever changed
We will never be the same
The more you change the less you feel
Believe, believe in me, believe
Believe that life can change
That youre not stuck in vain
Were not the same, were different tonight
Tonight, so bright
Tonight
And you know youre never sure
But youre sure you could be right
If you held yourself up to the light
And the embers never fade in your city by the lake
The place where you were born
Believe, believe in me, believe
Believe in the resolute urgency of now
And if you believe theres not a chance tonight
Tonight, so bright
Tonight
Well crucify the insincere tonight
Well make things right, well feel it all tonight
Well find a way to offer up the night tonight
The indescribable moments of your life tonight
The impossible is possible tonight
Believe in me as I believe in you, tonight
토요일아침에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려 했는데 매일 자전거를 대놓는 우편함 앞이 텅 비어 있었다. 털렸구나..하는 생각이들었다. 걸어가며 해야 할 일들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게시판에 사진과 분실글을 올리고 경찰서에 신고하고..근처 전봇대에 전단도 붙여야 하나.. 만약 자전거도둑을 잡는다면 어떻게 해버릴지 수집가지를 상상했다. 오랫만에 느끼는 적개심에 놀랐다.
자전거를 사기위해 포장마차에서 보냈던 겨울날들과 자전거를 사서 설레이며 조립했던 기억, 지난 여름날 함께 여행을 하며 뜨거운 햇살과 비바람을 맞았던 날들까지 도둑맞은것 같아서 무척 불쾌했다.
오늘 근처 파출소에 신고를 했다. 경위서를 쓰고 자전거 사진을 프린트했다. 찾을수 있을것 같지는 않지만. 눈에 띄는 모든 자전거를 유심히 쳐다본다. 아무것도 없는 우편함 앞이 무척 허전하다.
일본의 1안 리플렉스 카메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아사히 펜탁스로 귀결된다. 그것은 1안 리플렉스의 원점이며, 나아가서는 카메라 왕국 일본을 만들어낸 원천이라 말할 수 있다. 1안 리플렉스를 창조해낸 아사히 광학(Asahi Optical Co.: 旭光學)은 1919년에 설립되어, 1920년대에 투영기 렌즈를, 1931년에 카메라 렌즈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2차 대전 중에 생산된 제품은 전부 군용이었다. 아사히의 명성을 알리게 된 것은 1951년의 일본 최초의 SLR인 아사히플렉스(Asahiflex) 이었다. 아사히 광학(Asahi Optical Co.:旭光學)은 그 후로도 끊임없는 개척정신을 발휘하여왔으며, 아사히플렉스라인은 여전히 펜탁스의 중심 카메라라인으로 남아있다.
▣ 아사히플렉스의 탄생
일본 최초의 35mm 1안 리플(35mm 1안 반사식카메라), “아사히플렉스(Asahiflex) I” 이 태어난 것은 1952년의 일이다. 패전 후 혼란으로부터 일어선 기존의 카메라 메이커들에 의한 6X6판 스프링 카메라와, 2안 리플, 35 미리판 렌즈셔터기가 주류를 이루던 시대였다. 라이카형의 고급기만이 거리계 연동식 렌즈교환형 카메라로는 유일하게 정전(停戰) 전(前)부터의 경험을 살려 조금씩 점유율을 늘려가고 있었다.
안경메이커였던 아사히 광학은 전후(戰後) 렌즈 연마에서부터 조업을 개시, 쌍안경과 천체망원경으로 사업을 궤도에 올렸다. 그 중에서도 타사는 손을 대지 않던 소형 쌍안경 쥬피터(Jupiter)는 월 생산량 500대였던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5,000대로 상승한 히트상품이 되었다. 소형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렌즈코팅을 할 때 최신기술을 도입하는 등 고품질의 제품을 남보다 빨리 도입했던 것이다. 이 평판은 카메라 메이커들도 듣고 수주를 늘리게 되었다.
당시 아사히 광학의 경영은 1951년 사장으로 취임한 창업주의 조카 마쓰모토 사부로(松本三郞)가 맡고 있었다. 마쓰모토(松本) 사장이야말로 "아사히 펜탁스"의 실질적 창업주라 할 수 있다. 그는 예전부터 연마회사에서 탈피 독자적인 제품을 생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먼저, 쌍안경으로 아사히 광학의 이름을 알렸던 것이었다. 그는 카메라를 몹시 좋아하여 독일제 6X6판 1안 리플 "리플렉스 코렐레(Reflex-Korelle)"를 애용하고, 그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때까지의 거리계연동식 카메라는 물론 2안 리플도 촬영 렌즈를 통해 상을 관찰하는 1안 리플식의 파인더에는 미치지 못했다. 렌즈교환을 전제로 하면 거리계연동식에 비해 1안 리플 카메라는 그야말로 "보이는 그대로가 찍히는 이상적인 카메라"였던 것이다. 게다가 컬러 리버설 필름의 출현으로 슬라이드 감상이 화제가 되어 ‘시차’없는 정확한 촬영이 기대되던 시기였다.
카메라 크기를 기준으로 마쓰모토(松本) 사장의 핵심 컨셉(Key Concept)은 "쓰기 쉽고 간편한" 것이었다. 당시 고급 카메라의 심볼이었던 라이카 C와 F를 참고로 카메라의 외형을 계산하라는 주문이 기술자에게 내려졌다. "소형, 경량"은 이후 아사히 광학의 철학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참고가 될만한 카메라는 가지고 있던 코렐레 밖에 없었다.
당시 1안 리플로서는 독일 이하게(Ihagee)社의 베스트판 엑잭타(Exata, 1933년), 35밀리판 키네 엑잭타(Kine-Exata,1936년)가 있었으며, 50 포토키나(PHOTOKINA) 에서는 동독 짜이스 이콘(Zeiss Ikon A.G.)社의 35밀리 1안 리플, 콘탁스 S(1949년)가 출품 되었지만 어느 것이나 몸체가 컸다.
처음으로 제품을 생산할 때는 설계자만으로는 지극히 어려운데 그 이유는 최초 개발자는 회사 내부에 제조 경험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기본이 되는 포컬플레인셔터(Focal Plane Shutter)부터 시작하여 일본 내에서조차 아직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복원 반사거울(반전 미러, Return Mirror)를 짜 넣은 미러 박스"까지...... 문자 그대로 영(零, 0)에서부터의 시작이었다. 캐논이나 미놀타, 니콘의 경우와는 전혀 틀렸다. 아사히 광학은 명실상부한 1안 리플렉스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1호기 ‘아사히플렉스(Asahiflex) I’의 제원(諸元)을 살펴보면 셔터가 B, 1/20∼1/500초까지 가능하며, 접는 방식의 핀트후드를 일으키면 초점조절스크린에 좌우 역으로 상이 비추어졌다. 셔터 버튼을 눌러 내리는 힘으로 미러를 상승시키고, 셔터를 작동시킨 후 버튼을 떼면 미러가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파인더는 웨이스트레벨 뿐이었고, 렌즈마운트는 37mm 스크류마운트로 표준 42mm사이즈가 아니었다.
개발자들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획기적인 신제품을 취급해줄 곳은 없었다. 잘 팔리고 있는 2안 리플렉스 쪽이 튼튼하고 안전한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판매처는 핫토리(服部,복부)시계점이었다. 테사(Tessar) 타입의 표준렌즈 Takuma 50mm F3.5를 포함한 판매가격은 2만 3000엔으로 책정되었다. 당시 포컬플렌 식으로 렌즈교환이 가능한 일본 내 라이카형 카메라가 5만엔 전후, 아사히플렉스는 그 반값이었다. 고급기라는 위치설정에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호평을 얻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사용 후 많은 의견들이 보내져왔다. ‘셔터 버튼이 무겁다’, ‘미러가 튀어 오르는 반동으로 손이 떨리기 쉽다’, ‘블랙 아웃을 없애주길 바란다’라는 등의 의견들 이었으며, 개발 당사자들 역시 인정하는 부분들이었다.
▣ 실용화를 증진시킨 퀵리턴 미러(Quick Return Mirror)
2년 후인 1954년에 발표된 아사히플렉스 IIb에서는 촬영 후에 미러가 자동적으로 복원되는 즉시복원 반사거울(퀵리턴 미러,Quick 또는 Instant return mirror)가 최초가 넣어졌다. 퀵리턴 미러의 실용화 없이 1안 리플렉스의 발전은 있을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1안 리플의 최대의 결점이었던 파인더의 블랙아웃이 해결되어 기동성을 갖추게 됨으로써 후에 라이카의 레인지파이더(Range Finder)식 카메라로부터 고급기의 왕좌를 뺏을 수 있게 된 것이다.
1/2초까지의 저속(低速, slow)셔터를 부착한 아사히플렉스 IIa(1955년)은 58mm F2.4를 포함하여 3만9500엔에 판매되었으며, [눈동자로부터 달까지]란 캐치프레이즈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아직 광각렌즈는 없었지만, 50mm F3.5, 85mm F1.9, 100mm F3.5, 135mm F3.5, 500mm F5 등 전용렌즈 6개와 접사용품으로서 자옥식 벨로즈(bellows) [베로스코프]와 [접사링]현미경어댑터 전용복사대 그리고 플래쉬 건 등까지 준비되었다. 명실상부한 일본최초의 아사히 펜탁스(AP)는, 아직 축대가 2개이면서 1초의 슬로우 셔터를 탑재, 필름감기는 레버식, 필름 되감기는 크랭크식을 채택함으로써 사용법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파인더를 통해 피사체를 보면서, 연속해서 찍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렌즈 마운트도 변경되었다. 당초의 플렉스는 직경 37mm였으나 펜탁스는 직경42mm의 소위 프락티카 마운트(Pentax/Practica Universal Screw Mount, M42 Screw Mount)로 직경을 넓힌 것이었다. 변경할 때 바요넷(Bayonet)식도 검토되었으나, 국제적인 호환성을 감안하여, 당시 프락티카, 콘탁스에딕서 등이 채용하고 있던 스크류 마운트(Screw Mount)로 결정했다고 한다. 1975년 바요넷(Bayonet)식의 K마운트로 완전히 바꾸게 되는데, 그 중간에도 몇 번이나 바요넷 마운트로의 전환이 검토되었으며 후에 베스트셀러가 된 펜탁스SP는 발매에 앞서 60포토키나에 발표할 당시에는 바요넷 마운트였다고 한다.
▣ 아사히 펜탁스의 탄생 / 추격 따돌린 고급기 K형
아사히 펜탁스 1호기(아사히 펜탁스 (오리지날), 펜탁스 AP라고 불림)는 1957년에 탄생하였다. 펜탁스는 아이레벨 파인더를 부착했으며, 표준42mm 스크류마운트를 가진 교환렌즈, 급송레버(rapid wind lever)와 접는 되감기 크랭크를 가졌다. 이 모델은 초기의 아사히플렉스와는 완전히 새로운 디자인이었다.
아사히 펜탁스 1호기가 탄생한 1957년에는 일본내 대기업 카메라 메이커들도 1안 리플렉스 시장참가를 시도하고 있었다. 퀵리턴 미러가 개발된 1954년, 라이츠(Ernst Leitz)社가 비약적으로 뛰어난 거리계연동식 파인더를 탑재시킨 라이카 M3를 발매함으로써. 라이카를 따라잡고 이를 뛰어넘은 듯이 보이던 캐논V나 니콘SP도 결정적이 답이 되지는 못했다. 그 라이카 M3의 등장이, 일본 카메라산업을 1안 리플렉스로 몰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기업의 톱을 달리던 東京광학의 톱콘R(1957년). 이어서 즈노 광학의 즈노 카메라와 千代田광학의 미놀타SR-2(1958년), 캐논 카메라의 캐논 플렉스와 일본광학(현재 니콘)의 니콘F, 보급기로는 쿠리바야시 사진기인 페트리페터, 중판의 젠저브로니카(1959년)등이 등장한다.
이렇게 뒤를 쫓는 신규 메이커들에 대항하기 위해 펜탁스는 고급화를 시도했다. 펜탁스K(1958년)에서는 셔터 최고속도에 1000분의1초를 추가하여, 이제까지의 1/2, 1/4, 1/8, 1/15, 1/30 배수 계열을 개정했던 것이다. 세계최초의 실험정신을 발휘하여, K형은 초점조절스크린(초점판 유리,Ground Glass)의 중앙에 마이크로 프리즘을 도입하여 초점 맞추기를 용이하게 했다.
또한 렌즈의 조리개 방식을 개정하여, 이제까지의 2중 조리개링에 의한 프리셋트 조리개에서 세미오토식의 자동조리개로 변경하였다. 이것은, 조리개 링을 원하는 눈금까지 돌리면 레버로 개방 할 수가 있어, 셔터버튼을 반만 눌러도 조리개가 조여지는 기구인 것이다.
펜탁스 K는 오토 타쿠마(Takuma) 55mm F1.8을 포함하여 5만1500엔에 팔렸다. 교환렌즈에는 리트로포커스(Retro-Focus)식의 광각 35mm F2.3에서 초망원렌즈 1000mm F**까지 모두 10개가 준비되었다.
1안 리플렉스는, 그 구조상 렌즈의 후면에서 필름까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광각 렌즈에 역망원 타입이라고도 불리우는 리트로포커스(retro-focus)식을 처음으로 도입하여 이를 실현 시킨 것이다. 오토 타쿠마 35mm F2.3은 당시로서는 매우 밝은 광각 렌즈였다. 또 1000mm렌즈는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활약하여, 후에 TV선전 "망원이다, 망원이다, 1000mm야, 1000mm야"로 널리 알려 지게 된다.
▣ 가격인하(Cost Down)
K라는 명칭은 1안 리플의 제왕, 킹이라 불리 우는 나름대로의 자부심을 표현한 것이었으나, 다음해 1959년에는 55mm F2를 부착한 3만5천엔으로 크게 가격을 인하한 펜탁스 S2를 발표했다. S2의 최고속도은 500분의1초였으나, K형의 단순한 스펙다운이 아니었다. 카메라 전면의 슬로셔터 다이얼을 중지하고 상부의 다이얼로 모은 소위 1축 무회전식으로 개정된 것이다.
당시 아사히 펜탁스사는 대량생산시스템을 도입하여, 생산성과 품질관리의 향상을 꾀했다. 파인더 접안부에 틈을 내어 정밀한 핀트조절이 가능하도록 매그니파이어와 로우앵글 촬영용의 레프컨버터(refconverter) 등 세세한 부분에도 심형을 기울였다. 보급기 가격의 고급 1안 리플로서 널리 애용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카메라 입문자의 반은 이 S2로 사진을 시작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이다. S2는 1000분의1초를 부활시킨 S3(1961년), S3에 셀프타이머를 내장시킨 SV(1962년)로 발전해 간다. 그 동안에 렌즈는 차례로 완전자동 조리개식의 슈퍼타쿠마(Super Takuma)로 변환, 현재의 1안 리플처럼 조리개가 항시 개방되어 있는 채로 파인더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처음으로 CDS를 이용한 착탈식의 연동노출계도 시스템에 첨가되었다. 그때까지의 셀렌식과 비교해 볼 때 표준렌즈의 화각(찍을 수 있는 범위)에 가까운 40도라는 좁은 수광각 덕분에, 정확한 노출을 측정할 수 있었다. 1962년 정도부터 컬러 네가 필름의 수요가 급격히 증대했다.
▣ TTL측광의 선견성
펜탁스 SP(펜탁스 SPOMATIC)의 전신인 펜탁스 스포트아이라는 시험작이 발표되었다. 이미 렌즈셔터식의 보급기에는 노출계내장형이 출현해 있었지만, 1안 리플에 노출계를 내장시킨다는 - 현재 모든 1안 리플에 도입되어있는 TTL방식- 발상은 당시 카메라 계에 혁명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TTL식 연동 노출계 내장 1안 리플의 발표로, 펜탁스는 또 다시 세계최초라는 개척정신을 발휘했다. [뉴욕타임즈]는 "촬영렌즈를 통해 빛의 양을 측정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이후 카메라의 새로운 경향을 만들어 낼 것이다."고 보도했다. 현재, 뉴욕타임즈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포토키나에서 발표된 스포트아이는, 1963년의 카메라쇼에 스포트매틱(SPOMATIC)이라는 이름으로 출품되었다. 원형이 스팟 노출계(spot meter)를 가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표준렌즈는 Super Takuma 50mm f1.4.
초점조절스크린의 중앙하부, 마이크로 프리즘 바로 아래에 CDS소자를 채워넣은 것으로, 화면의 일부를 측광하는 스팟(Spot) 측광방식이었다. 파인더 화면에 항상, 직경 3mm의 검은 점과 리드선이 보였다. 발표 후 곧바로 발매할 생각으로, 이미 양산 시험, 수십대가 모니터로서 프로사진가들 손에 넘겨져 있었다.
프로의 의견은 찬반양론이었다. [메이커로서는 훌륭하다. 하지만, 먼지처럼 보이는 검은 점은 용납할 수 없다.] 그 비판을 무시할 수 없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급히 변경되었다. 파인더 접안부의 양옆에 CDS를 배치하고, 펜타프리즘을 통해 들어온 초점조절스크린의 평균적인 밝기를 측광하는 평균측광방식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측광시에는 렌즈의 조리개를 촬영시의 치수까지 조여서 측광하는 스톱다운(stop-down)방식을 채용하였다. 심플한 구조로 비용 측면에서도 유리했기 때문에, 이후 많은 메이커들이 이 방식을 채택하게 되었다. 카메라 쇼 후에, 바로 발매된 탑콘 RE슈퍼는, 1안 리플의 미러위에 작은 틈을 내어 미러 뒷면에 붙인 CDS로 수광시킨다는 미러메터 방식이었다.
1년 후, 카메라에 새겨진 스포매틱 문자는 그대로 펜탁스 SP의 명칭으로 발매되었다. "TTL 조리개 평균측광 정합점 일치식 연동노출계 내장"의 1안 리플의 탄생이었다.
▣ 렌즈의 고성능화와 SMC
1971년에 발표된 세계 최초 조리개 우선 AE 시스템을 갖춘 Asahi Pentax ES에는 또 한가지의 화제거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표준렌즈로 SMC Takumar 50mm f1.4를 채택했다는 사실이다. 세계 최초로 1안 리플용 렌즈에 SMC(Super Multi Coating, 다층반사방지막)을 시행한 것이다. 렌즈의 표면에서 반사된 일부 광선이 유해한 광선이 되어 렌즈의 광학성능을 떨어뜨리게 된다. 구성매수가 많은 대구경 렌즈나 줌렌즈를 고성능화 시키기 위해서는, 렌즈의 투과성능 향상이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렌즈의 표면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단층 코팅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으며, 우주공학 분야에서나 이용되던 멀티코팅을 일반 대중용에 투입한다는 것은 당시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동사(펜탁스사)는 교환렌즈용의 무척 콤팩트한 설비를 도입하여, 전제품을 SMC화했던 것이다. 마침, 컴퓨터 도입으로 렌즈 설계기술이 비약적으로 향상, 발전될 가능성이 보이던 시기였다. 고성능의 렌즈가 차례 차례로 설계되었지만, 플레어나 고스트에 의해 설계대로의 성능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현실이었으며, 이 기술도 현재는 각 카메라 메이커가 도입하고 있는 선견성있는 기술이었다.
▣ K 마운트로의 변경 / 펜탁스의 시련
퀵 리턴 미러, TTL측광, 조리개 우선AE의 개발과, 1안 리플의 분야에서 끊임없이 선구자의 길을 걸어온 펜탁스에도 커다란 시련이 닥쳐왔다. 렌즈교환이 귀찮은 스크류마운트와 결별하고, 처음으로 바요넷식의 K마운트를 채용한 카메라가 펜탁스 K2, KX, KM의 세 기종이었다. 이것이 1975년의 일이다. K2와 KX에는 응답속도가 빠른 수광소자 SPD(실리콘포토 다이오드)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채용되었다.
그러나, 이런 "세계최초"도 이번에는 빛을 받지 못했다.
1972년, 올림퍼스 광학이 크기와 무게를 강조하며 야심차게 발표한 OM시스템의 올림퍼스 OM-1, OM-2의 크기와 무게를 앞에 하면 신선미가 느껴지질 않았고, 다음해인 1976년에 캐논이 대량생산 시스템을 도입하여 5년만에 생산한 캐논AE-1에는 가격 면에서 대항할 수 없었다. 특히 캐논 AE-1의 출현은 "AE-1쇼크"로써 카메라 개발사에 새겨지게 되었다. 펜탁스 뿐만이 아니라 막 탄생한 올림퍼스를 포함한 전 1안 리플 메이커들이 큰 타격을 받았다. 이것을 되돌리는데 4년간이란 시간을 소비하게 된다.
현재 펜탁스가 채용하고 있는 프로그램 AE대응의 KA마운트와 AF 1안 리플용의 KAF마운트는 펜탁스K마운트에서 시작된다. K마운트에서 잊어서는 안될 것이 한가지 있다. 펜탁스가 K마운트를 채택하면서 후발 메이커들에게도 K마운트 사용을 권장한 사실이다. 이제까지 프락티카 마운트(Pentax/Practica Universal Screw Mount, M42 Screw Mount – 이를 채용한 회사는 Practica, Fuji, Ricoh, Chinon, Cosina, Kalimar, Sears, Vivitar, Yashica and Zenit 등)의 1안 리플을 만들어온 많은 메이커, 그리고 해외 상사 브렌드인 1안 리플의 대부분이 합세하여 K마운트를 채용했다. 각 사의 바디와 렌즈를 상호간에 쓸 수 있다는 점으로 이전의 프락티카 마운트같은 메리트가 발생했다.
그러나, 다음 프로그램AE시대에 개량이 이루어진 KA마운트는 타사가 사용하는 것을 거부했다(Ricoh, Chinon, Cosina, Phoenix, Vivitar and Sears 등은 가능). 이 시점부터 같은 K마운트 이면서 프로그램 AE의 작동방식이 틀린 마운트가 생겨남으로써 유저(수요자)들에게는 반갑지 않은 상황이 전개되었다.
▣ 어디까지나 이어지는 세계최초
올림퍼스 OM-1으로부터 4년, 캐논 AE-1부터 반년후인 1976년에 이르러 소형, 경량, 저가의 1안 리플의 발매가 실현됐다.
개량한 GPD(갈륨포토아이오드)를 최초로 채용하고, 노출표시로 메터(Exposure Meter, 노출계)를 사용하지 않고 MX는 처음으로 3색의 LED로 정점합치(定点合致), ME는 속도 눈금을 적색 LED로 도트 표시와 함께 나타냄으로써 신선함을 주었다. ME에 최고속 2000분의1초 매뉴얼셔터를 첨가한 펜탁스 ME 슈퍼(ME-Super)에는 셔터 다이얼로 바뀌는 2개의 업/다운 버튼을 탑재했다. 세계최초의 버튼 조작이었다.
이 ME슈퍼와, 건전지 없이도 작동하는 MX는 펜탁스SP에 이어 롱셀러기(long seller Camera)가 되었다. ME슈퍼는 AF기의 SFX가 그 뒤를 이어가게 된다.
▣ 방수, 방진 바디 또한 세계최초
롱셀러기(long seller Camera)는 또 있다. 1980년에 발매된 펜탁스 LX가 바로 그것이다. 펜탁스로서는 처음으로 펜타프리즘 착탈식으로 캐논 F-1이나 니콘 F/F2에 필적하는 펜탁스 사용자를 위한 대망의 최고급기(最高級機)였던 것이다. 여기에서도 펜탁스만의 개척정신을 발휘하여, 1안 리플로서는 처음으로 방수, 방진의 밀봉 구조의 바디를 완성시켰다.
게다가, 전자제어에 의한 조리개 우선 AE와 건전지 없이도 작동 가능한 기계식 셔터를 동시에 탑재한 본격적인 프로 성향의 카메라이면서도 당초의 이념인 소형, 경량의 정신을 관철했다.
▣ 뒤쳐진 AF화
1981년 ME슈퍼를 모체로 하는 AF 1안 리플 펜탁스ME-F가 발매되었다. 그러나, 합점에 약간 시간이 걸리는 콘트라스트 방식이었기 때문에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펜탁스측도 오히려 타사에 지지 않으려 프로그램AE화에 힘을 쏟았다.
1983년에는 멀티모드AE의 펜탁스 슈퍼A, 다음해인 1984년에는 자매품인 프로그램A, 1985년에는 프로그램A의 와인더 내장기 펜탁스 A3데이트를 발표했다. A3데이트는 펜탁스 최초의 자동감기기계였으나, 같은 해 미놀타도 역시 처음으로 자동감기기계 X-7000을 발매했다. 미놀타 X-7000의 출현은 본격적인 AF 1안 리플 시대를 알리는 “쇼크”로서 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AF 1안 리플에 뒤쳐진 펜탁스가 이를 만회하는 데는 2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을 쏟아 부어야 했다. 그 동안은 프로그램AE기 펜탁스 P30이나 명기SP의 K마운트판 펜탁스 K1000등 저가의 카메라 판매에 주력할 수 밖에 없었다.
▣ 스트로보 내장에서도 세계최초
1987년 펜탁스 SFX는 [풀타임 AF의 슈퍼포커스]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자신감을 가지고 등장했다. 쿨머의 헤드라이트와 같이 내장된 스트로보가 튀어나오도록 설계된 "리트랙터블 TTL오토스트로보"와 손으로 맞추는 것보다 정확하고 빠른(High Speed) 슈퍼포커스로 "AF보조광 내장에 의해 빛에 구애받지 않는다"라는 [최초]가 2개나 붙었다.
손앞에 기울인 대형 액정표시 오버헤드디스플레이는 사용법을 중시하는 펜탁스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였다. SFX는 그 다음해, SF7과 SFXN으로 진화되어간다.
▣ 끝으로
펜탁스의 "세계최초"는 양(量)과 질(質) 모두 경쟁사를 능가한다. 퀵리턴미러, TTL측광, 전자제어식무단계 변속 셔텨 등 "세계최초"의 수가 많다. 이러한 펜탁스의 “세계최초” 기술 대부분은 경쟁사들도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들이다. 지극히 합리적이면서 필연적인 기술이었던 것이다.
1안 리플은 온갖 촬영목적에 응할 수 있는 만능기로서, 교환렌즈 등의 시스템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거액의 개발비를 들여 제품을 개발하더라도 본전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1안 리플 전문메이커로 철저히 지내온 아사히 광학이지만, 1982년 펜탁스 오토롱으로 전자동 콤팩트에 참가, 1986년에는 펜탁스 줌70으로 현재의 줌내장 콤팩트 카메라시대를 알리는 선두주자가 되었다.
마운트 변경과 AF화에 잠시 지체되었던 펜탁스이지만 이제까지 지나온 어느 제품도 꼼꼼한 노력이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때 그때에 얻을 수 있는 최신의 기술, 최신의 소재를 도입하고, 타협보다는 정도를 고집한 펜탁스의 특징은 [바보같이 정직하단 말야!]라는 어느 개발자의 독백에 그대로 배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전에는 Yesterday나 Let it be 정도밖에 모를때가 있었지만 요즘 한창 들으면 들을수록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어떤 평론가가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현대 음악의 90%는 이미 비틀즈가 40년 전에 실험해보았고 매번 그 점수는 90 점 이상이었다고도 하니 요즘의 뮤지션들은 정말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참신한 기법이라 생각하고 나름대로 그럴싸한 곡을 써서누군가에게 들려주었는데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전설적인 그룹이 썻었던 곡과 비슷하다는 평을 들었다고 생각해보라..
늘어지게 자다 비오는 소리에 깨엇다. 멍하게 누워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보니 배가 고팟다. 밥해먹기는 귀찮고.. 모레부터 시험이라 뭘 먹고 공부는 해야되는데..지갑에는 달랑 삼천원이 있었다. 통장잔액은0. 하지만 맛있는게 먹고 싶어져서 단골가게에서 돈까스덮밥을 사먹었다. 내일하루먹을거야 어떻게 되겠지..학교에서 일본어학개론을 조금하다 이게 다 뭐하는짓인가 해서 다 집어치우고 집으로 향했다. 단것이 먹고 싶어져서 던킨에서 도너츠 여섯개를 종류별로 골랐다. 카드잔액이 얼마간 남아있어서 다행이었다. 도너츠 상자를 들고 오며 이걸 먹는것도 거의 연례행사라는 생각을 했다. 영화를 보며 도넛을 먹었다. 조금 울었다.
배가 별로 고프지 않아 저녁을 거르고 알바를 했다. 마칠때까지 배가 고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 그냥 속이 좀 허하다는 느낌만 들었다. 그런게 배가 고픈건가.. 어쨋든 속을 채우기 위해 오랫만에 토스트가게에 들렀다. 그동안은 카메라를 사느라 세끼밥을 제외한 간식과 기호식품은 자제해왔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손에 넣은 지금도 주머니사정이 빈한것은 마찬가지지만 몇일 더 버티면 들어오는 생활비가 지갑을 열게해서 요 몇일간은 450원하는 빵과 1500원짜리 학식을 벗어날수 있었다.
1학년때부터 다닌 단골가게에 들러서 언제나처럼 양파 많이 넣어주세요 하니 양파도 오이도 햄도 남들 배로 넣어주시고 속도 반조각 더 넣어주셨다. 두툼한 토스트를 들고있으니 먹기도 전부터 속이 든든했다.
집에 돌아와 조금 놀아주고 무릎위에 앉힌 뒤 쓰다듬어 주자 좋다며 손을 깨문다. 제법 아파서 일부러 과장되게 "아야 아야"하고 소리를 내자 놀란눈으로 나를 쳐다보고는 살짝 한번 더 깨문다. 예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술이 떡이되어 경찰차를 얻어타고 집에 돌아온적이있다. 그때 나는 현관에 쓰러져있던 모양이다. 어머니께서 나를 깨우시다 내가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자 걱정이 되셔 나를 찰싹찰싹 때리셨는데 그때 준이는 어머니에게 하악하악거리며 화를 냈다고 한다.
주석
주석이 인용의 출처를 밝히는 역할만 하는 건 아니다. 때때로 주석은 보다 유명하고 중요한 저서들을 인용함으로써 인용하는 사람이 그 저서의 수준에 있으니, 인용된 저서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자기가 쓴 글을 읽어볼 생각도 하지 말라는 속내를 드러내는 역할도 한다.
~P.36 주석
메모상자-철학적수집활동을 위한
메모상자는 메모용공책에 대한 대안으로 16세기부터 사용되어옴.
콘라트 게스너
Conrad Gesner(1516-1565). 스위스의 의사,박물학자.동식물에 관한 체계적인 저술로 유명하다. 포괄적인 서지를 계획하고 과거와 현재의 모든 작가들은 편집하여<일반도서총람Bibliotheca universalis>를 만들기 시작했다. 1555년 완성된 이 계획의 일부는 기재 사항들을 몇 가지 지식 범주로 나누는 것이었다. 포괄과 분류를 모두 시도한 공로로 그는'서지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는 의학과 동물학, 식물학은 물론 고전어까지 거의 손대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의 만물박사였지만,"20년 전부터 줄곧 이어져온 야간 노동에서 단 한 번만이라도 벗어나 쉴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소망을 토로할 정도로 궁핍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가 메모상자를 고안해낸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중요하고 쓸모있을 거라 생각되는 모든 것은 한쪽 면만 쓸 수 있는 질좋은 종이에 적어라!"라고 충고. 그때부터 메모상자는 학자들 사이에 널리 애용되었다 함. 수집된 참고자료는 폐품 더미가 아니라 더불어 이야기 나눌수 있는 마법정원과 같으며 수집가는 그 정원에서 더 없이 좋은 시간을 보낼 때가 많다.
대략 몇년 정도 지나면 메모상자가 너무 복잡해져서 수집가 자신도 어디에 무엇이 있는 분간하지 어려워 지지만 창조적인 작업에는 그런 메모상자가 더 잘 어울린다. 분야들을 고정되게 나누지 말고 분류 상자 속에서 온갖 생각과 메모의 네트워크가 점점 크게 자라나도록 하는게 좋다고 노련한 메모상자 이용자는 말한다.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이 권하는 메모상자 이용법은 다음과 같다.
1.A4 용지를 반으로 잘라 메모지로 삼는다.
2. 메모지에 생각나는 것, 흥미로워 보이는 것 혹은 듣거나 읽은 것 중에서 인상적인 것들을 적는다.
3. 한 면에만 쓰도록 하자. 메모상자가 좀더 빨리 차오르기는 하겠지만, 메모지를 상자에서 끄집어 내지 않고, 그대로 넘겨가며 읽을 수 있다.
4.같은 테마에 속하는 메모지끼리 분류하여 한 칸에 모아둔다.
5. 그렇게 만들어진 칸에 해당테마를 떠올릴 수 있는 철자로 표시를 한다.(패러디 항목이라면 'P'라고 쓰면 된다). 그 표시용 철자는 그 칸에 있는 메모지 모두에 똑같이 적어놓는다.
6.그리고 같은 칸에 있는 메모지에 일련번호를 매긴다(이를테면 P4,P5...). 그렇게 하면 어느 메모지든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애초 있던 자리에서 꺼내 자리를 옮겨 놓지 않았다면 말이다.
7.각 메모지마다 그와 관계있는 다른 메모지들의 번호를 적어 놓는다. 그렇게 하면 각 메모지들은 제자리에 있으면서도 방향을 지시할 수 있다. 필요할 때 그 메모지를 찾으면 또 다른 방향 지시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메모지마다 하나의 네트워크를 이루게 된다. 작업을 할 때는 메모상자를 열고 그 네트워크를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8.책에서 발췌한 인용 문구들을 적은 메모지를 관리할 때는 작가이름순으로 정리한 메모상자를 따로 두는 것이 좋다.
메모상자에 꾸준히 먹이를 주다보면 몇 해 지나면서부터는 그 상자에 집어넣지 않았는데도 끄집어낼 수 있는 어떤 생각의 체계가 생겨난다. 관계있는 메모들을 하나하나 따라가며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거의 자동적으로 우연한조합들이 생겨나고 또 재미았는 계열이 생기기도 하는데, 그것들은 새로운 생각을 펼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학생시절부터 메모상자 작업을 시작했던 니클라스 루만은 심지어 메모상자가 자기 자신보다 더 똑똑하다는 말까지 했을 정도자. 그는 메모상자야말고 더불어 말이 통할 수 있는 존재라며, 메모상자 덕에 자신의 수많은 책들이 저절로 씌어지듯 했다고 말한다.
루만의 방법이 너무 번거롭다는 사람에게는 베이컨의 방법이 어울릴지 모르겠다. 이 방법은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아니라 그와 이름이 같은 영국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1909-1992).영국의 화가. 인간을 주제로 한 강렬한 이미지로 현대인의 고독과 공포를 표현했다.베이컨의 그림은 대부분 고립된 인물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인물은 기하학적인 구즈물에 둘러싸인 경우가 많고, 격렬한 색채로 묘사되어 있다. 그는 유화 물감을 다루는 솜씨가 매우 뛰어났는데. 능숙한 기법으로 분노와 공포 및 흥분의 이미지를 표현했다. 그는 작품을 많이 없애버렸기 때문에, 주로 미국과 유럽의 미술관에서 소수의 작품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에게서 나온것이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한 명인 베이컨에게도메모상자가있었는데, 이 상자는 여러 구역과 층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메모지가 뭉쳐져 덩어리가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이 메모상자 안에서 걸어 다닐 수도 있었다. 그랬다. 그 안에서 베이컨이 살았던 것이다. 그 메모상자는 런던에 있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아틀리에 바닥과 가구들과 사방 벽으로 뻗어갔다.베이컨식 메모상자 구축 방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묵은 신문들을 모아 기사나 사진들을 오려내 바닥에 던진다.
2. 책이며 카탈로그를 보다가 재미있는 것이 있으면 찢어 바닥에 던진다.
3. 친구들 사진이나 자기 사진 -엑스레이 사진도 좋다- 를 끄집어내 기름 묻은 손으로 만진 후 바닥에 던진다.
4. 옛날 음반들을 끄집어내 바닥에 던진다.
5. 옛날의 자기 그림들 -원고도 좋다- 을 꺼내 스스로 찢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찢게 하여 바닥에 던진다.
6. 헌 옷가지며 신발들을 바닥에 던진다
7. 여기저기 기름이나 맥주를 부어 낱장들이 서로 달라붙어 덩어리가 되게 한다.
몇 해 정도 꾸준히 이 방법을 쓰다보면 상당한 양의 무더기가 만들어 진다. 질 좋은 포도주처럼 메모상자 역시 발효되고 숙성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섞어주고 경우에 따라서는 솎아내기도 해야 한다. 무더기처럼 보이는 저런 메모상자를 가지고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모든게 뭉쳐진 덩어리 속에서 메모며 그림들을 어떻게 도로 끄집어 낼 수있단말인가?
물론 여기서어떤 특정한 것을 염두에 두고 찾는다면 그건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러나 어떤 걸 찾아낼 수는 있다. 그것도 메모지와 온갖 종이 그리고 그림들이 뒤섞인 난장판 속을 어슬렁 거리다가 말이다. 그러는 가운데 자동적으로 기존의 질서가 흐트러지고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진다. 그러고 난 다음 바닥에 새로 생겨난 별자리들을 살펴보며 거기서 새로운 영감을 얻고 개별 조각들을 끄집어내어 가다듬고는 다른 자리에 도로 내던진다. 후략.
~챕터9 수집
옌스 죈트겐 지음;도복선 옮김,생각발전소, (북로드,2005)
-제목그대로 생각을 발전시키는 방법들을 알려주는 책이다. 부제는 철학자에게 배우는 논리의 모든것. 원제는 selbstdenken스스로 생각하라. 원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책이라 그런가 어렵지 않고, 유머가 있는 적절한 예시를 통해 철학적 사유를 설명한다. 단순한선으로 철학자들의 특징을 뽑은 일러스트도 마음에 든다. 좋은 책!
대부분의 청중이 자신들을 모른다고 해서 섭섭해하지말것, 대부분의 청중이 자신들을 이름을 안다면 오프닝으로 세우지 않는다.
레퍼토리에 지난세월에 유행한 가요의 리메이크를 하나 넣고, 유명한 곡의 카피도 넣는다. 자작곡은 어차피 아는 사람이 없거나 적을터이니 단순한 구성으로 된것을 넣는다. 물른 곡들은 분위기를 '적당히' 띄우는 곡들이어야 하며 그에 맞는 오버하지 않는 액션도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
자신들이 오프닝밴드임을 자각하고 있어야 하나 청중에게 그것을 깊이 인식시킬필요는 없다. 밴드의 본분을 다한다면 청중은 즐거워할 것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4곡정도의 공연이 끝나고 예의상 혹은 정말로 앵콜요청이 들어와도 그것을 '정중히' 거절해야한다는 점이다. 메인공연을 언급하면 효과적이다.
메인공연 짬짬히 분위기를 띄우는데 협조한다면 거의 완벽한 오프닝밴드! 연주와 곡이 마음에 든 일부청중이 다른 곡들을 들을수 있는 방법을 물어볼지도 모르니 홍보수단도 항상 준비해 둘 것.
1.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다. 나는 꽤 성실한 학생이라 수업을 열심히 듣는다. 하지만 주변의 학생들이 수업시간중에 나에게 수업내용중에 이해가 가지 않는 무엇인가를 물어보면 그것에 답해주느라 선생님에게 지적을 받게 되었다. 서서 수업을 들으라는 벌도 받게 되었다. 새침한 여자 선생님은 꽤 화가 나셨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지않고 수업내용을 잠시 알려준것이 잘못한일인가 하고 생각해서 서서도 즐겁게 수업을 받는다. 그런 내 모습을 보는 선생님은 더 화가 나신 눈치이다. 그런 일이 몇번인가 계속되고 불량학생으로 오해를 받게 되자 나는 어떻하면 선생님이 내가 착한 아이인줄 알아주실지 고민한다.
2.방과후에 집에 오니 내 방에 뱀이 나타났다.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제법 큰 녀석인것 같다.넓은 그 방을 같이 사용하는 동생과 나는 뱀의 독에 대한 두려움때문에 뱀을 잡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방을 사용하지 않을수도 없고 해서 몇일정도를 불편하게 지내다가 드디어 뱀을 잡기로 마음먹었다. 동생은 식칼, 나는 야구 방망이를 들고 뱀이 숨어있을만한 구석을 들쑤시니 과연 뱀이 스스륵 움직인다. 도망치는 뱀을 쫓아가며 몇번정도 뱀을 친것 같기도 한데 때렸다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뱀을 다시 보니 뱀이 아니라 고양이 같기도 한데 저 번쩍이는 비늘은 뱀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도망치는 뱀이 우리에게 왔다. 발목을 깨물린것 같아서 이제 죽을지도 모르겠구나 하고 앉아있는데, 이 뱀 하는 요량이 이상하다. 왜 내 발목에 몸을 부비는 걸까.. 자세히 보니 아기고양이인데 등쪽에 뱀 비늘 같은게 나 있을 뿐이였다. 다행히 크게 다친곳이 없었다. 병원에 데려갔다 오며 동생과 나는 고양이의 처우를 생각하다 결국 우리집의 두번째 고양이로 키우기로 했다.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두려움은 진실을 보는 눈을 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