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그대
서영은
먼지 낀 유리창 너머로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고 있는 거리를 차분히 내다보며, 문자는 장갑을 한쪽 또 한쪽 끼었다. 빨 때마다 오그라들고 털이 뭉쳐 작아질 대로 작아졌기 때문에 그녀는 장갑 낀 손가락 새새를 꼭꼭 눌러주어야 했다. 몇 년 전 이미 한 차례 유행이 지나간 알록달록한 털장갑을 여태 끼고 다니는 사람은 그녀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장갑만 구식인 건 아니었다. 소매 끝이 날깃날깃 닳아빠진 외투며, 여름도 겨울도 없이 신어온 쫄쫄이식 단화, 통은 넓고 기장은 짧아 발목이 껑뚱해 보이는 쥐똥색 바지, 보푸라기가 한켜나 앉은 투박한 양말, 서랍에서 꺼내어 얼찐거릴 때마다 반찬 내를 물씬 풍기는 가방 등, 몸에 걸치고 지닌 것마다 구멍만 뚫리지 않았다 뿐이었다. 문자의 이런 차림새는 사십 고개를 바라보도록 노처녀로 알려진 그 녀의 입장을 더한층 측은해 보이게 했다. 아동도서를 간행하는 H출판 사에서는 문자는 영업부 편집부 통틀어 최고참이었다. 입사 이래 현 재까지 그녀는 줄곧 교정일만 보아왔다. 편집부 정원은 부장을 포함해서 일곱이었다. 그사이 문자만 제외하고 자리마다 얼굴이 수없이 바뀌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축일수록 반년도 못 채우고 떠나갔다. 출근 첫날부터 의자가 기우뚱거린다, 화장실 이 더럽다, 층계가 가파르다, 등등의 불만이 하나씩 쌓여가다가 나중엔 말끝마다 '이놈의 데 얼른 떠나야지, 더러워서 못해 먹겠어' 하고 궁시렁거렸다 하면 견뎌야 한두 달이 고작이었다. 문자는 그런 나이 어린 동료들로부터 노골적으로 따돌림을 받았다. 그네들로서는, 가르마에 새치가 희끗희끗하도록 무엇 하나 이룩해 논 것 없이, 한평생 있어봐야 별 볼일 없는 출판사에, 그것도 말석에서만 십 년을 보낸 노처녀 동료가 있다는 그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네들의 눈엔, 문자가 교정지를 앞에 하고 등을 쭈그리고 있을 때는, 그녀의 등 뒤에만 보이지 않는, 유난히 시린 바람이 회오리치고 있 는 듯이 여겨질 때가 많았다. 그리고 그녀의 턱언저리는 늘상 소름이 돋아 까실까실한 것같이 보였다. 점심시간에 다들 우르르 몰려나가 곰탕 한 그릇씩 먹고, 다방에 들러 커피까지 마신 뒤 사무실로 돌아와 보면, 두 손으로 뜨거운 보리차 컵을 감싸쥔 문자가 그네들을 맞았다. 그네들은 문자가 측은하다 못해 마음이 언짢아져, 어쩌다 그녀 쪽에서 말을 건네오면 심히 퉁명스럽게 내쏘았다. 그렇더라도 문자는 한 번도 기분 나쁜 표정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나이 어린 부장으로부터 이따금 민망할 정도로 면박을 받아도 늘 다소곳이 받아들였다. 동료간에 그런 것처럼 사내 규칙에 대해서도 그녀는 한마디 불평 없이 성실하게 지켰다. 다른 동료들이 입 모아 사장을 험구하고, 시설이나 월급에 대해서 불평을 늘어놓아도 그녀만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런 그녀를 두고, 나이 어린 동료들은 문자가 밥줄이 떨어질 까봐 두려워해서 몸을 사리는 줄로 알았다. 그네들은 문자가 주눅들고 처량해 보일 때마다 남몰래 자기자신에게 다짐하고 했다. "나도 저렇게 될까 무섭다. 얼른 여기를 떠야지" 문자는 이제 창문으로부터 돌아섰다. 퇴근시간이 이십여 분이나 지났음에도 다른 동료들은 자리에 앉은 채 노닥거리고만 있었다. 퇴근 시간이 임박해지자 한참 전화가 오고 가고 하더니 저마다 약속이 된 모양이었다. 문자는 가방을 집어 들고 부장 쪽으로 다가갔다. 그가 다른 동료랑 하던 얘기를 끝낼 때까지 기다린 끝에, 먼저 가겠다는 인사말을 남기 고 사무실에서 나왔다. 계단을 서너 개 내려오노라니, 안에서 미스 최의 조심성 없는 목소리가 그녀에게까지 들려왔다. "참 안됐어요. 토요일인데도 전화 한 통 걸려오지 않구" "집으로 가봤자 반겨주는 사람도 없을 테구" "어머, 왜요? 결혼은 안했더라도 가족은 있을 거 아녜요" "이런, 한 사무실에서 너무들 하시군. 같은 여자끼린데 신상파악은 하고 있어야지" "본인이 가르쳐주지도 않는데 어떻게 알아요?" "하긴 나도 몇 다리 건너들은 소리지만, 부모는 일찍 돌아가시고 오빠가 한 분 있었는데 수년 전에 이민 가고 그때부터 내내 혼자처지 인가 봐. 고생도 무지무지하게 하고. 지금까지도 용두동인지 어디에 세들어 있는 방 전세금이 전부라나 봐" "이상하다? 옷도 안해 입고, 도시락도 꼭꼭 싸오겠다, 그만큼 알뜰 하게 십 년이나 직장생활을 한 사람이 어째서 그 정도밖에 못 모았을 까" "이상하구 자시구, 남에게 신경쓸 거 없이 미스 최나 뜸들이지 말고 대꺽 면사포 쓰라구" 문자는 그네들이 혹시나 이쪽에서 들어다는 것을 알고 무안해 할까 봐 나머지 계단은 소리를 죽여 살며시 내려왔다. 길에 나서니 바람이 생각보다 매웠다. 언제나 좁은 골목에 한두 대 쯤은 정차하고 있어 행인을 불편하게 하던 승용차들도 보이지 않았다. 길 양쪽으로 즐비한 밥집의 문전도 평일 같으면 드나드는 사람들로 한 창 북적댈 시간이었으나 한산하기만 했다. 어느 집 추녀의 못이 삭았 는지 함석 귀가 들려 널뛰는 듯 덜컹거리는 소리만 자못 바람의 기세를 짐작게 했다. 그녀는 목덜미가 선득거리자 외투깃을 올렸다. 회사 앞 골목을 빠져 나오며 그녀는 생각했다. 내 인생이 남 보기에 그렇게 안되어 보일 만큼 실패 ?걸까? 그러자 괜히 웃음이 터져나올 것 같아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자 기가 동료들과 세상 사람들을 멋지게 속여넘기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가 세상 사람들 앞에 은닉하고 있는 것은 남루한 옷차림의 이돌영이 도포 속에 감춰가지고 있던 마패 같은 것은 아니었다. 또는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가난한 여주인공이었던 여자 가 알고 보니 무슨 재벌 총수의 딸이더란 식의 돈 많고 지위 높은 아버지를 감춰두어서도 아니었다. 글쎄, 그녀로선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 는 자기 맘속의 어떤 그윽한 힘찬 상태, 그걸 뭐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문자로선 유행의 흐름이란 데 따라 바지통이 넓어지든 좁아지든, 외 투 길이가 짧아지든 길어지든, 또 동료들이 자기를 미스라 부르든 선생이라 부르든, 의자가 기우뚱거리든, 사장이 잔소리가 많든 적든, 그 런 것은 정말 아무래도 좋은 일로 여겨졌다. 언젠가 자칭 <교정박사>라는 비교적 나이든 한 여자가 새로 입사했다. 그녀는 출근한 지 열흘도 못 되어 옆자리의 남자직원이 자기를 선생이라 부르지 않고 미스라 부른다고 대판 싸운 끝에 이튿날 사표를 집어던졌다. 문자는 삿대질을 하며 악악거리는 그녀를 멀거니, 신기한 듯이 쳐다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남들이 자기를 뭐라 부르든 그게 무슨 큰 대수로운 일이라고.> 도로 자기의 교정지 위로 고개를 떨군 문자는 턱을 깊숙이 감춘 채 혼자 빙그레 미소지었다. 타인의 눈에 자기가 형편없이 초라하게 비치어 있는 것을 의식할 때 도 그녀는 잠자코 맘속으로만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불쌍해 보여도 좋고, 초라해 보여도 좋다. 너희 맘대로 생각해라.> 또 어떤 날은 출근해서 서랍을 열어보면 쓸 만한 사무용품들이 다 없어지고 몽당연필 하나와 볼펜 껍질만 소롯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었 다. 그때도 그녀는 몽당연필 하나만으로 견디든가 자기 돈으로 다른 볼펜을 사오면 사왔지 절대로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속으로만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좋다. 내게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다 가져가라> 다른 회사로 옮겨가 부장이 된 옛 동료가 봉급을 더 많이 주겠다는 조건으로 몇 차례나 그녀를 끌어가려 했을 때도 문자는 한사코 거절했다. <몇 푼 더 받겠다고 이리저리 철새처럼 옮겨다닐 사람은 다니라 지. 하지만 난 그깟 몇 푼 없어도 살 수 있어.> 일요일이나 공휴일에 일직을 하는 거며, 그 밖의 사내 궂은일들을 모두 슬그머니 그녀 앞으로 미뤄놓고 달아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좋다. 그까짓 얼음물에 청소 좀 한다고 손이 떨어져나가는 건 아니니까, 뺄 사람은 빼라지.> 물론 이보다 몇 배나 불리하고 괴로운 일을 당한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기에게 지워진 어떤 가혹한 짐에 대해서도 결코 화를 내거나 탄식하지 않았고, 피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억센 정신은 아직 도 얼마든지 무거운 짐을 짊어질 수 있다는 듯이, 항시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하지만 H출판사 직원들이나 주위 사람들이 보기에 문자는 그저 <죽 은 듯이 가만히 있는 사람>으로만 보였다. 그네들은 아무도 문자의 그런 침묵이 <어떤 상황, 어떤 조건 아래서도 나는 살아갈 수 있다> 는 절대 긍정적 자신감에서 기인된다는 것을 몰랐다. 더욱이 그 자신 감이, 자신들의 키를 훨씬 넘어 아주 높은 곳에 있는 어떤 존재와 겨루면서 몇만 리나 되는 고독의 길을 홀로 걸어오는 동안 생겨난 것이 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일만큼은 문자로서도 너무나 곤욕스러웠다. 정말 저녁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십만 원을 구해야 했다. 짓눌린 듯 무거운 맘으로 문자는 공중전화를 바라보며 걸었다. 한 청년이 전화에 매달려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의 높은 웃음 소리가 그곳서 꽤 떨어진 문자에게까지 들려왔다. 며칠 전 통화했을 때 이모 는 분명히 확실한 어조로 잘라 말했다. 그러나 이제 다급해진 문자는 다시 한번 더 이모에게밖에 매달릴 데가 없었다. 그녀의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이따금 급할 때마다 돈을 변통해 왔던 친구에겐 아직 갚지 못한 빚이 있어 더 이상 매달려볼 염치가 없었다. 청년의 통화는 한정없이 늘어질 듯했다. 상대쪽에서는 빨리 오라고 조르는 모양이었고, 이쪽에서는 WBC타이틀매치 위성중계를 놓칠까봐 지금은 안 되겠다는 내용이었다. 청년의 등 뒤에 서서 시린 발을 동동거리며 문자는 건너 빌딩의 높은 꼭대기 위로 빠른 물살처럼 흘러가는 음산한 구름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바람은 쉬이 잘 것 같지 않았다. 청년은 자기 주장대로 관철된 것이 흡족한 듯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서야 공중전화 앞을 떠났다. 문자는 아직 청년의 미적지근한 체온이 배어 있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이모, 전화 또 했어어요" 그 이상 할말은 없었다. 찍찍거리는 잡음만 한동안 계속되었다. 이 윽고 이모 쪽에서 '쯧쯧' 하고 약간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하여간 얼굴이나 좀 보자" 눈물이 핑 돌아 앞이 흐릿한데도 문자는 기를 쓰고 그래야 하는 듯 이 누군가 전화받침대에다 그려논 낙서를 손톱으로 지우고 또 지웠다. 매달 얼마씩 가져가는 것 이외에 이따금 한수가 적지 않은 목돈을 요구해 오는 데 대해서 문자는 한 번도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오히 려 돈을 받아 넣으면서 불안해진 한수가 제풀에 화를 내곤 했다. "젠장, 내가 뭐 이러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아. 두고 보라구" 그는 항시 이번만은 틀림없다고 전제하면서, 광산에 자금을 투자해 줄지도 모르는 유력한 자본주를 만나는 데 급히 필요하다고 했다. 문자 에겐 그의 말의 진부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옥조를 그가 데리고 있는 이상, 그를 도움줌으로써 옥조에게도 간접적으로 도움이 될 거라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설사 그가 집에는 한푼도 들여놓지 않고 예전의 씀씀이대로 그것을 하룻밤 술값으로 날려버린다 하더라도, 역시 상관없었다. 문자는 어제 그런 일 때문에 더 이상 마음 상하지 않았다. 한수는 그녀에게 천 개 의 흉터를 내었을 뿐, 그녀가 그 흉터를 스스로 딛고 일어선 지금에 이르러서 그는 이미 그녀의 맘속으로부터 지나가버린 그 무엇이었다. 그가 무자비한 칼처럼 그녀에게 낸 상처 하나하나를 딛고 일어설 때마 다, 문자의 정신은 마치 짐을 얹고 또 얹고 그러는 동안 자기 속에서 그 짐을 이기는 영원한 힘을 이끌어낸 불사의 낙타 같았다. 그러난 한수는 문자의 주위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로 그런 사실을 조 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바보스러울 만크 착하다고 여겨지던 그 녀가 딱 한 번 <무서운 여자다> 하고 생각된 때가 있었다. 왜 그렇 게 생각되었는지 그 이유는 그 자신도 확실히 알지 못했다. 문자가 옥조를 낳은 지 한 달도 못 되어서였다. 그는 아내의 등을 떠밀어서 문자로부터 옥조를 빼앗아오게 했다. 아내와의 사이에 일남 일녀를 둔 그가 새삼스레 그 자식이 탐났을 리는 없었다. 그는 옥조 를 데려옴으로 해서, 문자를 영원히 자기 곁에 붙잡아둘 수 있으리라 고 계산했다. 데려온 핏덩이를 내려놓으면서 그의 아내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세상에, 얼마나 변변치 않은 년이었으면 집 안을 그 꼴로 해놓고 산단 말이우. 미리 겁부터 줄려고 뭘 좀 때려부술까 해도 눈에 띄는 게 있어야지. 없다없다 해도 손바닥만한 경대조차 없는 여편네는 내 생전 처음이라니까" 한수의 아내는 말은 그렇게 했지 ? 기실은 문자의 살림이란 게 캐 비닛 하나뿐임을 보고 속으로 적이 안심했었다. 아무것도 없이 산다 고 늘상 남편으로부터 들어온 터이긴 해도 그녀는 설마 했었다. 왜냐 하면 남편이 광업소 소장으로 있었을 무렵, 봉투나 값진 선물을 가지 고 찾아오는 업자들이 문턱에 줄을 이었던만큼,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쪽으로 얼마든지 빼돌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수의 아내는 남편 덕으로 뜻하지 않은 밍크나 악어백이나 보석 같은 것을 몸에 휘감게 될 때마다, 혹시 그년이 나보다 더 좋은 ?갖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치밀어올라 남편 속을 슬그머 니 떠보곤 했다. 그러다 한수는 광업소를 그만둔 뒤 자영해 보겠다고 중석광산을 하나 사들였다. 그리곤 지녔던 동부동산은 물론 집이며 선산까지 팔아 광산에 집어넣었다. 끼니거리가 없어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보석반지까지 팔아야 했을 때 한수의 아내는, 나만 이렇게 빈 털터리가 되는 게 아닐까, 그년은 여전히 몸에다 보석을 휘감고 있는 데 나만 거지꼴이 되는 게 아닐까 싶어 새삼스레 속이 지글지글 끓었 다. 올케에게 ?빌린 밍크와 악어백으로 치장하고, 용두동 개천가의 개 구멍만한 쪽문을 밀고 들어서, 한달음에 문자의 살림속을 읽고 난 그 녀는 공연히 가슴을 태웠다 생각하니 우습고 허전했다. 남편이 가져 다 주었음직한 것은 정말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한때 방방마다 놓아두었던 그 흔한 텔레비전 한 대도 없고 보면, 남편의 그녀에 대한 사랑이란 건 대수롭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러자, 한수의 아내는 애엄마가 순순히 아기를 내놓더냐고 남편이 물어보자 매처럼 사납게 눈을 부릅떴다. "순순히 안 내놓음 지년이 별 수 있어요? 호적에도 못 오른 년이 새끼를 낳아놓고 할말 하겠다 고 들면 그게 되려 뻔뻔스럽지. 어쨌든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 새끼 만 잠자코 들여다보더니 딱 한마디 합디다. 아기가 한밤중에 깨어서 우는 습관이 있으니 그럴 때는 숟갈로 보리차를 몇 모금 떠먹이라나 어찌라나" 한수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아내에겐 들리지 않게 "하여간 맹추라 니까. 제 속으로 난 자식인데 그렇게 맥없이 뺏겨?" 하고 중얼거리다 가 단단한 쇠꼬챙이에 명치를 치받힌 듯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그 소리 없는 조용함이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그 무엇으로 그의 가슴에 와닿았던 것이다. 한수가 십 년 전 처음 문자의 자취방으로 드나들기 시작했었던 때는 한겨울이었다. 유난히도 눈이 잦았던 그해 겨울을 문자는 거의 지붕 위에서 살다시피 보냈다. 눈이 쌓인 채로 놔두면 그 물이 언제까지나 콘크리트 천장으로 스며들어 곳곳에서 낙수가 지곤 했다. 오르내릴 사닥다리도 변변치 않았고, 고압선이 길게 늘어져 있어 위험하기 짝이 없는데도, 문자는 부삽을 들고 날개가 달린 듯 지붕으로 오르내렸다. 식당을 한다는 주인집 내외가 비죽이 웃으며 대청마루에 선 채 구경삼아 쳐다보고 있거나 말거나, 그녀는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마치 춤추듯 가볍게 눈을 퍼서 지붕 아래로 집어던졌다. 어쩌다 지나가던 행인 이 흙탕물이 튀었다고 화를 내면, 날으듯 뛰어내려 그의 바짓가랑이를 털어주며 만족할 때까지 몇 번이나 사과하고 나서 또다시 지붕으로 올라가곤 했다. 또한, 헛간이나 다름없는 문자의 부엌에는 수도가 없었기 때문에 안 집 마당에 있는 수도에서 일일이 물을 길어다 먹었다. 안집 마당으로 가자면 부엌 뒷문으로 나가서 높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이 전의 세든 사람들에겐, 그 계단이 죽지 못해 오르내리는 굴욕의 사다리로 여겨졌었다. 그 가난한 여인들은 자신이 양손에 물바께쓰를 들 고 낑낑거리며 계단을 오르는데, 주인집 여자가 비죽이 웃으며 자기의 뒷모습을 주시하는 것이 무엇보다 싫었다. 그러나 똑같은 방을 빌려 사는 처지이면서도 문자는 그녀들과 전혀 달랐다. 그녀가 뒷문 앞에 나타날 때 보면, 무슨 좋은 일을 하다가 중단하고 나온 것처럼 항시 두 뺨이 발그레했다. 때로 그녀는 양손에 바께스를 든 것도 잊고 층계참에 서서 한참 동안씩 하늘을 쳐다보곤 했다. 그러고 난 뒤엔 두 뺨에 발그 레한 빛이 안에서 불을 켠 것처럼 더욱 짙어졌다. 그녀가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은 마치 몸 속에 깃들어 있는 싱싱한 생명의 탄력이 음계를 밝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그 계단은, 그 위에 있는 아주 신비롭고 아름다운 세계를 그 녀 혼자만 누리기 위해, 외부로 나타난 부분을 일부로 조악하게 꾸며 논 것같이 보였다. 주인집과 그 집에 세들어 사는 여느 식구들은 문자가 새벽같이 층계참에 나와 매운 연기를 마셔가면서도 연탄화덕에다 신나게 부채질을 활락활락 해대며 때로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광경을 종종 볼 수 있 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부엌의 아궁이에선 물이 솟았기 때문이다. 아궁이뿐만 아니라, 지붕이며 방고래를 고쳐달랠 만한대도 문자가 혼자 힘으로 잘 참아나가자, 주인집은 고마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녀 에게 물세 불세까지도 터무니 없이 물리었다. 그래도 문자는 한마디 도 따지지 않고 달라는 대로 선선히 내주었다. 마치 큰 여유가 있어 그만한 일은 불문에 붙이는 것처럼. 때문에 한집에 세들어 사는 여인들은 문자의 살림형편이 겉보기보다 훨씬 알심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어느 날 그녀들은 자기들끼리 짜고 불시에 문자를 찾아갔다. 방 안을 찬찬히 둘러본즉, 물이 스며든 천장 은 페인트칠이 일어나 너덜거렸고, 녹슨 손잡이가 달린 캐비닛 이외에 이렇다할 세간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들로서는 문자의 두 뺨에 서린 발그레한 홍조와 노래를 몸에 휘감고 있는 듯한 그 발랄한 생기 가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더욱 몰라졌다. 그녀들은 문자가 수돗가에 나왔다가 떠나고 난 뒤에, 향기 좋은 꽃으로 가슴을 꾹 눌렸다가 뗀 것 같은 그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중 누가 엄지손가락으로 돌았다는 시늉을 해 보이면 거기에 전적으로 동 의하는 폭소를 터트렸다. 그녀들은 이미 확인한 바와 같이 문자는 남다른 무엇을 소유했던 게 아니었다. 그녀로선 무엇을 하든 그 일을 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한 것뿐이었다. 콩나물을 다듬든, 연탄불을 피우든, 지붕 위의 눈을 치우든. 그를 생각하노라면 어딘가 높은 곳에 등불을 걸어둔 것처럼 마음 구석구석이 따스해지고, 밝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 따스함과 밝은 빛이 몸 밖으로 스며나가 뺨을 물들이고, 살에 생기가 넘치게 하는 것을 그녀 자신은 오히려 깨닫지 못했다. 한수가 그녀에게 오는 것은 단지 일요일 밤뿐이었지만, 그는 항시 그녀의 시렁 위에 걸려 있는 등불이나 다름없었다. 시장에선 물건을 깎다가도 그녀는 <그가 만약 이 사실을 안다면> 하고 깎는 일을 그만 두었고, 남과 다툴 뻔하다가도 그를 떠올리면 분노가 촉촉하게 가라 앉았다. 이렇게 해서 월요일, 화요일...... 토요일을 보내는 사이에 그는 그녀 의 존재 자체를 조금씩 연금시켜, 이윽고 일요일이 되었을 땐 그녀의 손길이 닿기만 해도 닿는 것은 무엇이든지 금빛 물이 들었다. 문자는 그가 미처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이미 그의 발걸음 소리를 알아듣고 미리 나가서 그를 맞아들였다. 그녀가 그의 옷을 벗기면 그 옷이 금빛으로 물들었고, 양말을 벗기면 양말이 그러했다. 뜨거운 물 이 담긴 대야를 가져와 그의 발을 씻기면 그 발 역시 금빛이 났다. 그녀가 그를 위해 마련한 저녁상은, 가난한 자가 일주일 내내 거친 솔과 젖은 걸레로 마룻바닥을 힘들여 닦아서 번 돈으로 성전 앞에 켤 양초를 사는 것같이 마련된 것이었다. 한수는 그녀가 살코기를 집어줄 때마다 입을 딱 벌려 받아먹기만 할 뿐 자기도 그녀의 입에 그 고기를 먹여주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한수의 마음은 무디고 이기적이어서 온 방안에 가득 찬 금빛 을 보지 못했고, 가만히 있어도 그 침묵이 노래임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그녀의 몸을 만지면서도 잘 익은 과육에서 나는 것과 같은 향기가 자기 손가락에 묻어나는 것도 몰랐다. 그는 마치 돈 없는 주정뱅이가 어쩌다가 값싼 술집을 발견하고도 긴가민가하여 자꾸 주머니 속의 가진 돈을 헤아려보듯이, 문자가 과연 자기가 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자기와 살아줄 것인지를 알고 자 끊임없이 탐색의 눈초리를 번득였다. 그는 이미 아내와 자식들이 있었으므로, 그가 문자와 더불어 지낼 수 있는 시간은 그가 빼내어도 그의 아내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의 시간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는 또 한 여당 소속 국회의원의 비서라는 그럴싸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수입은 보잘것없었다. 그래서 그는 문자에게 생활비 같은 것을 보태 줄 처지가 못 되었다. 그는 문자로부터 어떤 요구도 받은 적이 없으면서, 항시 이 여자가 내가 줄 수 있는 한도 밖의 것을 요구해 오면 어쩌나 하고 불안해 했 다. 그는 문자가 화장도 하지 않고, 모양도 내지 않고, 집 안에 값나 가는 물건을 사놓으려 하지도 않는 걸로 봐서, 욕심 없는 성격이라는 것을 간파했으면서도 여전히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그가 모시고 있던 K의원이 장관으로 발탁되었고, 그의 도움으로 광산과 출신의 한수는 반관반민의 동동광업소 소장으로 임명 되었다. 그의 수입은 이제 문자에게 정식으로 딴살림을 시킬 수 있을 만큼 풍족해졌다. 그는 멋진 새 집을 사서 이사를 했고, 그의 아내와 자식 들은 좋은 옷을 입었고, 가만히 앉아 심부름하는 사람들의 시중을 받았고, 과일과 케이크는 미처 먹지 못해 곰팡이가 필 정도로 지천이었 다. 그럼에도 그는 문자에겐 아무것도 나누어주지 않았다. 사과 하나, 귤 하나도. 이따금 그는 문자에게 가져가라고 무심히 과일바구니 하 나를 집어 들었다가도 도로 내려놓았다. 일단 그녀에게 무엇을 주기 시작하면, 혹시나 끝없이 요구의 손길을 뻗쳐오지 않을까 겁이 났다. 문자는 여전히 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주인집에서 방값 을 올리자 그녀는 자기 힘으로 구해 보다가 끝내는 방을 옮겼다. 그 사이 물가가 많이 올라서 문자가 그에게 예전과 같은 저녁상을 차려내 기 위해서는 자기가 일주일 살 몫에서 더 많이 쪼개내야 했다. 그녀 는 버스를 두 번 타는 대신 한 번만 타고 나머지는 걸었다. 그리고 점심도 라면으로 떼웠다. 반대로 한수의 몸에서는 날이 갈수록 기름이 번지르하게 흘렀다. 그는 매번 올 때마다 구두를 갈아 신었고, 와이셔츠나 넥타이와 카프 스버튼과 내의까지도 달라졌다. 양복도 가지각색으로 늘어났다. 어느 날 문자는 시계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의 내의자락을 뒤 에서 꽉 움켜쥐며 "가지 말아요. 오늘 밤만은 함께 있어줘요" 하고 등 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이내 잡은 옷자락을 맥없이 놓아주는 순간, 울컥 울음이 넘어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예전에는 문자의 손길이 닿은 것마다 금빛으로 물들었던 것이 이제는 그녀의 가슴을 미어지게 할 때가 많았다. 그녀는 그에게 옷을 입혀주려고 옷걸이에서 양복을 걷어내다 그 속주머니에 찔려진 두툼한 돈뭉치를 보고도 목이 메였고, 보자기에 싸서 아랫목에 묻어두었던 그의 구두를 꺼내다가 밑창에 새 겨진 고급상표를 보고도 가슴이 미워졌다. 그녀의 맘속에서는 해일이 일고, 번개가 치고, 폭풍이 몰아치는 종말 같은 나날이 계속되었다. 아무도 없는 강가나 깊은 산속에 가서 목놓아 울고만 싶은 슬픔이 그녀의 두 뺨에서 발그레한 홍조를 차츰차츰 스러지게 했다. 또다시 집값이 올라 하루 종일 방을 구하러 다니다 돌아오던 길에, 문자는 소주 두 병을 샀다. 안주도 없이 단숨에 소주 두 병을 비우고 나서 그녀는 의식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자기가 눈부신 아 침 햇살과 끈적거리는 오물 속에 누워 있음을 발견했다. 새로이 눈물이 괴어올라 눈앞이 어룽졌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때 그녀 속에서 낙타 한 마리가 벌떡 몸을 일으켜세우며 외쳤다. "고통이여, 어서 나를 찔러라. 너의 무자비한 칼날이 나를 갈가리 찢어도 나는 산다. 다리로 설 수 없으면 몸통으로라도, 몸통이 없으면 모가지만으로라도. 지금보다 더한 고통 속에 나를 세워놓더라도 나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거야. 그가 나에게 준 고통을 나는 철저히 그를 사랑함으로써 복수할 테다. 나는 어디도 가지 않고 이 한자리에서 주 어진 그대로를 가지고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테야. 그래, 그에 게뿐만 아니라, 내게 이런 운명을 마련해 놓고 내가 못 견디어 신음하면 자비를 베풀려고 기다리고 있는 신에게도 나는 멋지게 복수할거야!" 회사에도 못 나가고 그녀는 이틀을 꼬박 누워 앓았다. 그 이튿날은 일요일이었다. 문자는 일어나서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같이 그를 맞기 위해 목욕을 하고, 시장에 다녀와서 은행알을 깠다. 그날 저녁 그의 넥타이를 받아 옷걸이에 걸다가 문자는 그것에 꽃혀 있는 진주 넥타이핀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은 이전처럼 미어지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의 맘속으로부터 그가 가진 모든 것이 무 관해졌던 것이다. 그가 누리는 모든 것이 그녀와 무관해졌다. 문자는 오로지 곁에서 담담한 맘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그의 끝없는 욕망이 그의 집 문전에 줄을 잇는 업자들의 선물상자와 돈봉투를 딛고 자꾸자꾸 높아지는 것을. 어느 날 새벽에 라디오와 TV에서는 베토벤의 영웅교향곡 2악장을 끝없이 되풀이하여 들려주었다.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국회와 내각이 해체되었다. 그런 뒤 두 달도 못 되어서였다. 한수는 수염이 텁수룩 하고 초췌해진 얼굴로 비틀거리며 문자에게 나타났다. 몸을 가누지 못할만큼 취해 방바닥에 퍼지르고 누운 그에게서 문자는 하나씩 옷을 벗겨 냈다. 갑자기 그가 문자의 옷자락을 움켜쥐며 목쉰 소리로 울먹 였다. "난 이제 아무것도 아냐, 우리집 문전엔 인적이 끊겼어. 그렇지만 너까지 날 괄시하면 죽여버릴 테다" 이모가 목욕중이었으므로 문자는 거실에 앉아 기다려야 했다. 그녀 가 앉아 있는 소파는 보드라운 깃방석 같았고, 아라비아풍의 두툼한 양탄자가 깔려 있어 발밑도 포근했다. 모든 것이 포근하고 쾌적했다. 천장에서부터 내려뜨려진 하얀 망사 커튼 너머로 뜰의 나무들이 세 찬 바람에 휘청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곳서는 추운 바깥 날씨조차도 아프고 시린 것이 아니라 쾌적하고 달콤하게 느껴졌다. 음산한 하늘 에서 차츰 먹빛이 배어났다. 욕실에서 타일바닥을 때리는 상쾌한 물줄기 소리가 들려왔다. 문자 는 갑자기 등이 시리고 몸이 저렸다. 그러한 자기자신에게 그녀는 이렇게 타일렀다. <약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보드라운 소파와 양탄자와 금칠을 한 벽난로와 비싼 그림과 쾌적한 침대 위에 세운다. 그런 뒤엔 그 물질로해서 알게 된 쾌적한 맛에 길들여져 그들은 이내 물질의 노예가 된 다. 그들의 갈망은 끝없이 쓰다듬는 손길에 의해서 잠이 잘 잔 말의 갈기와 같다. 하지만 내 정신의 갈기는 만족을 모르 "저어......" 셈을 치르려던 문자는 상점 주인의 망설이는 얼굴을 쳐다보았다. "저어, 아까 아저씨가 들어가시면서 오징어 한 마리하고 고량주 두 병을 가지고 가셨어요" "네, 알겠어요. 그건 얼마죠?" "가만 있거라 보자, 천팔백 원이군요" 찬거리를 들고 문자는 상점에서 나왔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 의 노란 창문들이 그녀로 하여금 한층 더 지치고 피곤하여 쉬고 싶은 생각을 간절하게 했다. 그러나 한수가 와 있으니 쉴 수도 없으리라. 그는 요즘들어 부쩍 허물어진 모습에 주사까지 늘고 있었다. 문자는 높교 가파른 언덕을 올라갔다. 가는 도중에 그녀는 고목나무 아래서 다리를 쉬었다. 언제나 다름없이 신선한 영감이 가슴을 뿌듯하게 차올랐다. 그 고목은 몸뚱어리가 온전치 못한 불구의 몸임에도 늠름한 키에 풍 성한 가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가지 하나하나가 모두 하늘을 어루만지려는 갈망의 손으로 보였다. 저토록 높은 데까지 갈망의 손을 뻗치기 위해서는 아마도 그의 뿌리는 자기 키의 몇 배나 깊이 땅 속으로 더듬어 들어갔을 것이다. 생명수를 찾아 부단히, 차고 견고한 흙 속으 로 하얀 의지를 뻗쳤을 나무의 뿌리가, 자신의 발밑에 맞닿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문자는 시린 삶의 아픔이 가시는 듯한 위안을 느꼈다. 문자는 미처 집에 닿기도 전에 대문 안에서 얼굴만 내밀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던 주인집 여자를 만났다. 가슴이 철렁했다. 역시 그랬 다. "아유 속상해 죽겠어. 색시 저거 좀 봐요. 저기다 또 오줌을 누었 어요. 개도 그렇진 못할진대, 남의 집 얼굴이나 다름없는 문간에다 찌 린내를 진동치게 해놓다니. 우리는 둘째치고 담벼락 주인이 알고 좇 아올까 봐 무섭군요" "정말 죄숑해요, 아주머니. 지금 당장 씻어내겠어요" 문자는 부엌 겸 자기 방 출입문으로 들어가서 찬거리랑 가방을 내려 놓고 대야에 물을 퍼담았다. 주인집 여자는 여전히 눈꼬리에 독을 묻 혀 가지고 서서 문자를 흘겨보았다. 지칠 대로 지친 육체에 굴욕의 비수가 꽂히자 감미로운 동요가 일어 났다. <고통의 사닥다리를 오르는 일이 다 쓸데없는 짓이라면? 이 길의 끝에 아무것도 없다면? 모든 것이 다 조작된 의미라면? 아픔과 고통 의 끝이 또 다른 아픔과 고통의 연속으로 이어진다면?......> 그럼에도 그녀의 팔은 오랜 동안 낙타의 지칠 줄 모르는 다리가 되 어왔던 까닭에 걸레질을 멈추지 않았다. 문자가 담장을 말끔히 씻어놓고 안으로 들어가려니, 주인집 여자가 그제서야 다소 누그러진 음성으로 그녀를 붙잡아세웠다. "색시, 잠깐만 기다려요. 편지 온 게 있어요" 잠시 후에 주인집 여자는 푸른 항공엽서 하나를 들고 나왔다. 그것 을 건네주며 그 여자는 밑도 끝도 없이 쌕 웃었다. 그 웃음은 또다시 문자의 가슴을 철러하게 했다. 틀림없었다. "이사 온 지 육 개월도 안 됐는데 이런 말 하기가 뭣하지만 이해해 줘요. 痢?아들이 방을 따로 쓰겠다고 자꾸 보채는구려. 복덕방비는 이쪽에서 물어줄 테니 다른 데 방을 좀 봐보려우?" "네, 알겠어요" 문자는 선선히 대답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발등이 터진 한수의 헌 구두를 집어 한쪽으로 가지런히 세워놓고 방문을 열었다. 한수는 꼼 아떨어져 자는 중이었다. 빈 고량주 병이 머리맡에 나뒹굴었다. 그의 머리는 텁수루룩하게 자라 귀를 덮었고, 와이셔츠 깃은 때가 절어 있 었다. 새우처럼 등을 구부리고 자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문자 에겐 이제야말로 내가 이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손에 들려진 편지 생각이 난 것은 그 다음 일이었다. 편지는 뜻밖 에도 미국에 간 오빠로부터 온 것이었다. 문자는 저녁을 지으려는 생 각이 앞서 편지를 대강대강 읽었다. "이건 무슨 편지야" 밥상을 차리는데 방 안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에게서 온 거에요" "내용이 뭔데?" "날 보고 들어오래요. 자기가 하는 슈퍼마켓이 너무 잘 돼서 손이 모자란대요" "쳇, 지금까지 소식 한 장 없다가 겨우 손이 모자라니 와서 도와달 라구? 당장 회답을 써보내, 웃기지 말라구. 물주만 만나봐, 그까짓 슈퍼마켓 같은 건 열 개라도 차릴 수 있어" 탁, 하고 성냥불 긋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짜증이 난 것은 편지 의 내용 때문이라기보다, 돈을 구했는지 못 구했는지 빨리 말해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헤아려졌다. 밥상을 차리다 말고 문자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한수는 핏발이 선 눈길로 얼른 모로 빗겼다. 문자는 가방에서 돈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 다. 그는 돈을 받는 즉시 담배를 신문지 귀퉁이에 눌러 끄고 벌떡 일 어났다. "저녁 다 됐어요" "지금 몇 신데 저녁타령이야. 다 늦게 들어와가지구" 문자는 잠자코 그에게 윗도리와 외투를 입혀주었다. 순간순간 그의 모질고 이기적인 성격을 엿볼 때마다 문자는 맘속으론 울고 입술로는 웃었다. 그가 단추를 채우는 동안 문자는 먼저 부엌으로 나와서 그가 신기좋 게 구두를 가지런히, 그리고 약간 벌려놓아 주었다. 밥을 푸다 만 밥 솥에서 서려오는 김을 보고 문득 쓰라린 비애를 느꼈으나 그녀는 조용 히 웃었다. 한수는 문자가 문 밖에서 배웅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곧장 뚜걱 뚜걱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언덕을 내려가 잠시 후엔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문자에겐 그가 자기 시야에서 끝도없이 있을 뿐인것으로 느 껴졌다. 그는 이미 한 남자라기보다, 그녀에게 더 한층 큰 시련을 주 기 위해 더 높은 곳으로 멀어지는 신의 등불처럼 여겨졌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것에 도달하고픈 열렬한 갈망으로 온몸이 또다시 갈기처럼 펄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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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나눔이 없는 글은 역시 읽기 힘들다;;;
http://www.info.go.kr 에 가입하시면 전자책으로 읽을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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