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김정남쌤께 빌린 우산을 돌려드리려 갔더니 먹을걸 주셨다. 내일 도서관에 전시행사가 있다고 그걸 준비하시느라 저녁드시고 남은 토스트다. 방금 저녁먹고 일하러 왔어도 그새 배가 고파져서 언제나처럼 사양않고 먹었다. 내일 전시에 쓸 목판에 곰팡이가 펴서 그걸 털어달라고 부탁하셨다. 삭삭 솔로 문질러 털어냈다. 목판에 먹을 묻혀 하나 찍어내서 전시해야 되는데 일손이 부족하다 하셨다. 재밌을것 같아 한다고 했다. 먹과 벼루와 붓등을 받아와서 일하는곳 앞의 큰 책상에 벌여놓고  먹이 묻을까봐 앞치마도 하고 팔토시도 하고 먹을 갈기 시작했다.

 먹을 갈고 있으니 조용하고 평화롭게 먹을 진하게 갈아서 난을 치던 시절이 생각났다. 중학교때 1년정도 난을 쳤었다. 미술실에서 아침에 한시간, 수업마치고 한시간정도 학생 열댓명과 선생님들 몇분이 같이 동양화를 그리고 있었는데 클럽활동은 아니였다. 나는 전혀 할 생각이 없었는데 어머니의 강권으로 가게 되었었다. 미술실에 가서는 조용히 담요와 벼루와 붓 연적 서진 종이등을 챙겨서 책장위에 준비를 한다. 붓과 종이와 먹은 개인이 준비해야 한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벼루와 먹마다 먹물을 갈때 감촉이 미묘하게 다르고 먹색과 질감이 차이가 난다는게 느껴져서 좋은 벼루와 서진을 고르고 고르곤 했었다. 먹은 어째서인지 냄세가 독한게 잘 갈리고 좋았다. 종이는 화방에 가서 각자 사서썻는데 문방구에 파는 화선지하고는 확실히 다르게 먹이 깨끗하게 먹혀서 좋았다. 붓은 토끼털로 된것인가 했는데 한참 쓰다보니 손에 잘 익어서 좋았지만 화방에 갈때마다 괜시히 다른 붓을 탐내고는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림에 조예가 없는건 마찬가지라 난을 한참치고 그다음에 대나무와 국화를 조금 배우다가 3학년이 되어서 입시준비를 하느라 관뒀다. 다른 아이들은 매화까지 다 배우던데 나는 대나무도 어려워서 못하겠더라. 웃긴건 내가 대회에 나가서 상까지 받은 것이다. 우수상인가 하는 상장을 받아들고는 동양화계는 정말 암울하구나..하고 생각했던것과 그렇게 맘에 들게 그리지도 않은 난을 표구를 해서 부끄러웠던게 기억난다. 연필을 잡아도 붓을 잡아도 악필인건 마찬가진데 미술선생님(성격좋아보이는 할아버지)이 내가 낙관한것을 보고는 낙관한번 멋지다 라고 해서 괜시리 기분좋았던것도 기억난다.

 목판에 먹을 바르고 화선지를 댄 뒤에 수건으로 살살 문질렀는데 금새 번져버렸다. 먹을 진하게 갈아도 계속 번지는걸 보니 목판인쇄를 하는것과 서예는 하는 것은 먹이 좀 다른가보다. 검색을 해보니 알콜성분을 넣고 먹을 갈아 판에 바른뒤 종이를 대고 사람머리카락에 밀랍이나 기름을 묻혀서 살살 문질러내야 된단다. 서지학시간에 비디오로 볼때는 쉽게 되는것 같더만 책만드는 장인이 보기보다 어렵다고 했던게 빈말이 아니었다.재료도 시간도 기술도 없어서 관두기로 했다. 정리하다가 남은 먹이 아까워서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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