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짧으니 평생을 들어도 다 못들을 정도로 많다는게 분할정도이다. 요즘은 비틀즈에 푹 빠져있고 그 여파는 전에 없이 엄청나 다른 것들은 귀에 대고 싶지않은 상태이며 언제쯤 비틀즈가 질리게 될지 알수 없다. 하지만 수많은 장르의 멋진 음악들이 줄을 서서 언젠가 내가 즐겁게 받아들여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음악이 존재하는 한, 좋은 음악을 소개 받고 새로운 아티스트를 알아가는 즐거움은 언제까지나 계속 될것이다.
과에 강의내용으로도 강의외적으로도 비호감으로 악명높은 교수가 있다. 이 내가 등록금이 아깝다고 생각될 정도로 강의를 날로 먹고 그 외적으로는 수많은 쪼잔하고 치사한 무용담들로 학부생들 사이에 회자되는 그런 교수인데 작년인가 이번 겨울인가 헷갈리는데 어쨋든 학과졸업식때의 일이였다.
피하고 싶었지만 어찌하다보니 그 교수와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콧구멍 바로 바로 아래에 뭔가 거뭇한게 제법 있다? 처음에는 콧수염인가 싶었는데 수염은 아니었다. 주의를 기울여 보니(내가왜!!내가왜!!) 그것들은 바로 콧털-_- 이었다. 그래 콧털. 겨울이니까 재채기하다 보면 어쩌다 한두가닥 빠져나올수도 있다. 그런데 저렇게 대량으로 콧털들이 자기영역을 벗어나려고 아우성인데 거울을 한번이라도 봤다면 모를수 있는것인가? 아아 콧털들이여. 너희는 그 존재를 나에게 너무나 선명히 각인지었구나.그 교수가 코로 숨을 쉴때마다 조금씩 흔들리는 콧털들을 보며 내가 한 생각은 당장 화장용품점에서 콧털소지가위를 사서 집에 두어야겠다는 생각뿐이였다. 그동안은 작은 가위로 적당히 해결했었는데 역시 끝이 몽특한 전용가위가 자극이 적다. 그리고 그 교수에게도 콧털가위를 선물하고 싶은 기분이 3초쯤 들었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착한 사람이 아니라서 그 뒤로 나는 그 교수의 얼굴을 되도록이면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있다.
동아리 모임장소인 어느 삼겹살집 앞에서 그렇게는 친하지 않은 선배가 담배를 한대 꺼내 물고 나에게도 한대 권하며 꺼낸 말에는 흡연자에 대한 동지의식이 배어있었다.
"몸이 안좋아서 많이는 안 피워요.."라고 대답하면서 받아물었다.
사실이 그렇다. 환절기만 되면 천식때문에 고생이고 증세는 해마다 안좋아지는것 같은 느낌이다.
여덟살쯤인가 동생과 88에 가스레인지 불을 붙여 피워본 뒤로는 이런 맛없는걸 왜 피냐고 쭉 생각해왔다. 담배를 피기 시작하면 내가 골초가 될것은 이미 기정사실임에 틀림없고 그러면 연초비도 부담이 될거고 부모님이 걱정하실거고 담배피는거 좋아하는 여자는 별로 없을거라는 생각들이 모여 스무살을 몇년이나 넘길때까지 담배를 피지않았었다.
그러다 몇년 전 유난히 추웠던 성탄절 새벽에 시린 가슴을 달래기 위해 담배구걸을 해서 처음 피우게 되었다. 그 아이는 담배피는 남자를 제일 싫어한다고 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냥 물고만 있으니 불이 안붙는다. 불 붙일때는 빨아들여야된다는것을 알았다. 마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만났던 나의 담배스승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으려나. 깊숙히 들이마신 디스플러스는 그다히 독한느낌이 아니었다. 공익근무원 대기실인 컨테이너 박스는 골초 고참들 덕분에 항상 뿌연상태였는데 거기서 이년이나 생활했으니 알게 모르게 익숙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쨋든 그때 맛본 흡연이 제공하는 약간의 쾌락이 제법 마음에 들어서 그 후로 여자한테 차였다거나, 기분이 무척 좋다거나, 술이 적당히 취했다거나, 남자 둘이 있는데 한명이 담배를 피기 시작한다거나하면 한대씩 피게 되었다.
그렇게 많이 피지 않았지만 금새 담배가 좋아졌다. 하지만 몸이 안좋아지는걸 느껴 조금이라도 오래 살아남아 담배를 피우기 위해 나름의 원칙을 정했다. 일년에 한갑분량만 핀다. 내가 사서는 피지 않는다. 한개비를 피울때 최대한 맛을 음미하며 마지막까지 핀다(이를 위해 담배대도 구입했다) 를 원칙으로 정했다. 돈이 걸린 문제라 나름대로 잘 지키고있는 편이다.
어제는 세대를 피웠고 방금 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올해는 열개비쯤 남았나, 전에 챙겨둔 시거는 언제 피지..
첫번째 출격시는 해상에서 사령관의 장황한 연설만으로 종료. 두번째 출격때는 리사섬을 유람 주유하고 종료. 이후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정부와 국내 여론이 들끓어 비난을 받자 페르사노 사령관의 말은
「 아직 우리 함대는 전투를 할 수 없다! 」
3
번째의 출격때에야 마지못해 전투를 시작, 리사 섬의 오스트리아군은 1개연대 반의 병력에 80문의 구식포가 전부여서 이탈리아군도
승리를 낙관하고 함대 28척에서 4시간동안 예비 포격을 가했지만 오스트리아 포대의 반격에 페르사노 제독은 즉각 후퇴(...)
최종적으로 이탈리아군은 군함 32척을 동원하고 병력 26,000명을 상륙시키고 나서 리사섬을 간신히 점령.
3. 1866년 7월 리사 해전
상대인 오스트리아 함대의 함포는 모두 시대에 뒤떨어진 전장식. 이탈리아 함대는 함포의 성능, 장갑함의 수, 함대의 총 숫자와 배수량에서도 상대를 압도했지만 역시 시대에 뒤떨어진 충각 전술에 의해 대패.
개
전 직후 사령장관 페르사노 제독은 최신예 장갑함「레디탈리아」에서 바로 며칠전 간신히 함대에 편입해 훈련이 부족한「아폰다토레」로
갈아탐. 이 결과 단종진을 이루던 함열이 일시 정지되고 선두함은 그대로 전진......함열은 분리되었고 이에 대해 오스트리아
함대의 테게토프 제독은 횡진으로 목조함까지 포함해 전력 돌격.
오스트리아 함대는 목조함까지 싸웠지만 이탈리아의 다른 함대는 방관. 최종적으로 오스트리아측의 침몰은 0, 사망자는 178명. 이탈리아측의 침몰은 3척, 사망자 약 800명.
함
대의 양과 질, 모든 스펙에서 오스트리아를 웃돈 이탈리아 함대는 구시대 전술에 대참패. 함고로 충각 전술이 유효하게 기능한 것은
이 해전이 최후. 게다가「 장갑함을 가라앉히려면 충각돌격이 제일!!」이라는 잘못된 전훈을 40년간 세계에 각인시킴. -ㅂ-;
4. 1895년, 에티오피아 아도와의 싸움
기
관총까지 장비했지만 왠지 원주민군에게 압도적 대패. 이 직전에 벌어진 안바·아라기의 전투에서도 이탈리아군이 참패한것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음. 즉, 이탈리아는 원주민을 상대로 왠지 2 연패......orz 최종적으로는 원주민을 상대로6000명 가까운
사망자를 낸 대패였음.
5. 1896년 3월 에티오피아 정규군과의 전투.
에티오피아군 전사자 1000여명에 대해 이탈리아군은 5000명 근대에 들어 백인이 유색 인종에게 진 전쟁은 러일전쟁이 최초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것이 처음.
6. 1917년 10 ~11월 카포레토 회전 ( 제 1차 세계대전 )
오스트리아군과 사이에서 벌어진 카포레토 회전에서 이탈리아군은 대패해 3주간 150 km를 패주. 오스트리아군의 사상자 2만 3천에 대해 이탈리아군은 사망자 1만, 부상자 2만, 포로 29만 3천, 탈주자 30만.
7. 1918년 10 ~11월사이. (역시 제 1차 대전)
오스트리아와의 휴전 교섭중 이탈리아군은 이 틈을 오려 피아브강을 넘어 공세로 나왔지만 오스트리아군에게 격퇴.
8. 1918년 11월 4일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 (역시 제 1차 대전)
「휴전 발효 후」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해 30만의 포로를 획득.
9. 1922년 에티오피아 침공전
항
공기와 전차까지 동원한 압도적인 침공전에도 불구하고 왠지 전투 초기에는 패배를 당해 전군이 포위되거나 전선이 붕괴되고 있다.
그때마다 이탈리아군을 구한것은 바로 독가스...........orz 이탈리아군은 핀치로 몰릴 때마다 독가스로 형세를 역전시켰고
이후 독가스 살포에 뒤잇는 독가스 살포로 어떻게든 억지로 승리.
참고로 에티오피아군의 장비는 오직 라이플 소총만으로 심지어 구식 머스킷도 현역(...) 기병은 창(...)이 무장이었다고 함. 또한 공무원을 급히 모아 편성한 군단에게조차 이탈리아군은 질뻔 한 것이다!
10. 1935년 10월 에티오피아 전쟁 두번째.
당
초는 에티오피아군의 후퇴 전술도 있어 순조롭게 진격했지만 수도 아디스 아바바로부터 진군한 에티오피아군에 포위되어 덴베그이나
고개를 지키는 검은 셔츠 부대는 대부분의 야포와 전차를 버리고 패주, 마칼레의 보급 기지까지 떠밀려 이탈리아군의 우익은 완패,
좌익의 보급 기지까지 위협당해 총사령관인 바드리오 장군은 전멸의 공포에 휩싸였다. 하지만 여기서 이탈리아군은 독가스를 사용해
형세를 역전시키고 이후 전투 종료까지 독가스를 계속 사용했다.
11. 1937년 3월 스페인 과달라하라 (스페인 내전)
마드리드를 목표로 한 이탈리아군 4개 사단이 진군했지만 과달라하라의 전투에서 다수의 투항자를 내고 패주
12. 1940년 6월 제 2차 세계대전 개전
이
탈리아는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한다. 하지만 단지 히틀러의 전과를 질투한 뭇솔리니가 즉흥적(...)으로, 그야말로 무계획적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전쟁에 필요한 물자의 비축도 거의 없었고 이탈리아 선적의 상선도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상황이었기에 선전포고
2개월 내 외양에 나가있던 상선 대부분이 영국해군에 나포되어 버린다. 또 어떤 작전계획도 명확히 계획하고 있지 않았었기 때문에
먼저 선전포고해놓고도 10일간 어떠한 군사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13. 1940년 6월 남프랑스 전역
독일군에게 유린되어 항복 직전인 프랑스에 침공한 이탈리아군은 불과 2개 사단도 안되는 프랑스군의 반격을 받고 붕괴 직전까지 몰렸다. 프랑스의 항복이 좀 더 늦었다면 이 프랑스군 부대는 이탈리아령을 침공할 계획이었음.
14. 1940년 10월 그리스 전역
이탈리아는 21개 사단을 동원해 그리스를 침공했지만 그리스군 13개 사단의 반격에 알바니아까지 후퇴해 붕괴 직전까지 몰린다. 그리스는 친 독일적인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 사건으로 연합국측에 가담.
15. 1940년 12월 이집트 전역
영
국령 이집트를 침공한 이탈리아군 7개 사단은 영국군 2개 사단의 반격을 받고 패주. 13만명이 포로가 되고 이탈리아령인
키레나이카까지 잃는다. 이탈리아가 무계획적으로 저지른 발칸과 북아프리카의 실정을 구원하기 위해 독일은 발칸을 제압했고 아프리카
군단을 편성해 파견한다.
하지만 이 발칸 제압을 위해 발바롯사 작전 발동은 1개월이나 늦어졌고 북아프리카 전선에도
7,000대의 트럭이 파견되었는데(당시 동부전선 전체에서 1만 4000대 밖에 없었음) 이것이 동부전선의 초기진격에 크게 영향을
주게 된다.
16. 1940년 10월 타란토.
영국해군 지중해함대의 항모 일러스트리어스에서 발진한 소드피쉬 21기가 타란토항의 이탈리아 주력함대를 공격. 전함 콩테 디 카부르는 대파착저, 전함 리토리오, 카이오.듀일리오 중파. 영국해군의 손해는 소드피쉬 2기.
17. 1941년 3월 마타판 해전.
마타판에서 이탈리아와 영국 수상함대가 격돌. 이탈리아 해군은 중순 3척을 상실했지만 영국해군의 손해는 전무.
18. 1942년 북아프리카, 튀니지.
25만의 이탈리아군 병력은 영국군 3만 5천과 전투, 튀니지에서 항복했다.
19. 1942년 12월 동부전선
돈 강변에서 이탈리아 제 8군은 소련군의 공격을 받자 바로 모든 병기를 포기하고 패주했다. 바로 전달인 11월달에 거의 비슷한 소련군의 공격을 받았던, 훨씬 장비가 열악했던 루마니아군은 며칠간을 선전하며 전선을 유지했다.
20. 1991년 걸프전
이
탈리아 공군의 토네이도 전폭기 이십여기가 출격, 왠지 첫 실전 공중급유에 이탈리아 공군의 토네이도는 절반이 실패하고 기지로 바로
귀환. 나머지 십여기는 이라크군 군사시설을 공격했지만 그중 몇기가 격추되어 파일럿은 포로가 되었다.
< 이탈리아군의 일화 >
참호속에서의 이탈리아군.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독일의 롬멜 원수가 이탈리아군의 참호를 방문했다. 하지만.....그 때!! 영국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이탈리아군의 병사와 장교는 모두「오 성모 마리아님!」이라고 외치며 지면에 엎드렸다. 이 광경을 지켜본 롬멜 원수는 이탈리아군 장교에게 이렇게 말했다.
「......기도를 멈추고 반격명령을 내리시오. 귀관이 할 말은 그것 뿐입니다. 」
이탈리아군 포로의 취급 북
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 장교에게 무장한 이탈리아군의 중대가 항복하기 접근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리품을 수집하기 바쁜 영국
장교는 그들을 무시한채「시끄럽다!, 저쪽으로 꺼져!」라고 이탈리아 병사의 총을 빼앗아 던지면서 고함쳤다. 이탈리아군의
무장중대(...)는 어쩔 수 없이 포로로 잡아주는 영국군을 찾기 위해 다시 총을 주워 또 터벅터벅 걸어갔다.
고문을 받은 이탈리아군 이탈리아인의「약함」은 처세술의 하나이기도 하다. 제
2차 세계대전중, 유고 유격대의 포로가 된 독일군은 끝까지 완고하게 부대의 정보를 일체 발설하지 않았고 고문에도 굴하는 일 없이
꼿꼿해 세르비아인의 분노를 샀지만 이탈리아군은 곧바로 울며 용서를 빌었으므로 고문이 멈추었다고 한다.
이탈리아인은 지역마다 강약이 다른가? 제1차 대전시까지는 각 지방에서 징병한 장병들을 균등하게 각 부대에 할당하고 있었지만1차 대전 후에는 지역별 편성으로 군제가 바뀌었다. 그러나.........이탈리아군의 약함에 지역차이는 없었다.
우리가 졸리면 저쪽도 졸린 이탈리아군은 밤이 되면「 우리가 졸리면 상대방도 졸리다. 그러니까 공격해 오지 않을 것이다」라며 경계도 세우지 않고 취침했다. 그 결과....수많은 기습을 허용했다.
국가나 민족이라는 의식이 희박한 이탈리아군의 병사가 한밤중에 눈을 떴는데 소대장이 어디론가 나가려는 중이었다. 병사는 소대장에세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그러자 소대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 나는 국가를 위해서는 목숨을 걸지 않는다. 나는 노예가 아니기 때문에!」
짐을 싸면서 그 대장은 매력적인 미소를 보이며.......
「 내가 목숨을 걸 때는 반한 여자를 지킬때 뿐이다!」
........라고 웃는 얼굴로 상쾌하게 말하며 전선에서 이탈해갔다. 그러자 병사도.....
「 소대장님! 기다려 주십시오!」
......뒤돌아본 소대장에게 부하는 이렇게 말했다.
「 저도 함께 갑니다!」라고.
이렇게 아침이 되어 다른 소대원이 눈을 뜨면 뜰수록 소대의 수는 줄어들고 있었다. 하루하루 지남에 따라 한 명 줄고 두 명 줄고......결국 영국군과 싸우기 전에 그 소대는 사라졌다.
정부는 바뀌어도 하는 짓은 변하지 않는 이탈리아군 1943년 9월 12일 오후 2시, 오토 스코르체니 중령이 지휘하의 무장 SS 및 공군의 혼성 강하엽병부대가 글라이더 12기에 분승 어느 산장근처 야산 분지의 평지에 강행 착륙했다. (착륙성공 8기)
이
산장을 경비하던 부대는 무장 SS란것을 알자마자 주저없이 항복, 스코르체니 부대는 산장 내로부터 뭇솔리니를 무사히 구출해 단거리
이착륙이 가능한 피젤러 슈트로히 연락기로 뭇솔리니와 지휘관 스코르체니 중령이 먼저 탈출했다. 그리고.........남은
부대원들은 유유히 케이블카로 하산했다.
영국해군 무장 어선과의 1:1 대결 잠수함「갈릴레이
(Galilei)」, 이탈리아의 위대한 과학자 이름을 붙인 군함이다. 하지만 이 군함은 영국해군의 무장 상선도 아닌 트롤어선
개조 무장 어선과의 1:1 승부에서 패배..........게다가 무려 포획되어 버렸다. 어선주제에 정면으로 싸움을 걸어 변변한
조준기도 없는데 차례차례 명중탄을 퍼붓고 승리한 로열.네이비도 굉장하지만 이탈리아 해군은 사관들이 다쳤다고 시원시럽게 백기를
걸고 항복해버렸다.
(잠수함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대잠 트롤선(ASW trawler) HMS Moonstone에게 포획되며, 이때 이미
기관고장에다 잠항불능상태에 빠진 상태였다고 합니다. 참고로 영국의 이런 대잠 트롤선에는 독일해군의 U-111, 215등도
격침됩니다.)
이탈리아의 전쟁학 1. 이길 수 없는 상대 = 절대 전쟁까지 가지않는다. 2. 강적 및 동격의 상대 = 약해지는 것을 신중하게 기다리고 나서 개전 하는 → 하지만 참패 3. 약한 상대 = 기꺼이 개전 → 하지만 왠지 참패 4. 절대 지는것을 생각할 수 없는 상대 = 기꺼이 개전 → 고전은 면할 수 없는
전쟁 준비보다 외화 돈벌이를 위해 자국 공군에도 배치가 끝나지 않은 기체를 수출하고 있었다고 한다. (전쟁중에 팔아먹은 최신형 전투기는 피아뜨사의 G50입니다. 40년6월 전투비행단이 창설되고 배치가 끝나지 않은상태에서 41년 1월 '최신 개량형'인 G50bis를 핀란드공군에 판매합니다)
이탈리아군이 미군의 공세를 막았다? 2차대전기 미군이 이탈리아 본토에 진출, 이탈리아군과 대치하고 있던 시기의 이야기다. 그러나 패전이 기정사실화된 이탈리아군에 전의는 없었고 미군도 그걸 눈치채곤 공격을 어영부영 하고 있었다. 하
지만 독일군의 관측기가 지나갔을 때는 제대로 싸우고 있는것을 가장한 이탈리아군이었다. 왜냐? 독일군이 오면 전쟁이 더 길어지므로
미군에 발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 미군도 의지없는 눈가림 반격, 그 전투을 독일군 관측기는 이렇게 보고 있었다.
「 대단해! 이탈리아군이 미군의 공세를 막고 있다! 」
하지만 그 후에 이탈리아군의 바램과는 달리 독일군이 구원으로 나타나 그 전투는 진짜 격전이 되어버렸다는(...)
신의 가호 이탈리아군은 화약의 경우 적절한 보관 장소가 발견되지 않을 경우 교회에 즐겨 보관했다. 교회라면 적군도 폭격까지는 하지 않을것이고 또한 신의 가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첨탑에 보기 좋게 낙뢰. 마을은 대폭발로 순식간에 1/5이 날아갔다고 한다.
나폴리의 도둑은 세계제일 2차대전기 이탈리아의 나폴리에서는 군함이 도둑맞은 사례가 있었고 중동전쟁의 한창때는 전차까지 도둑맞았다고 한다.
군용기에 관한 일화 이탈리아 공군은 2차대전기때까지도 전기간에 있어 계기 비행의 훈련을 전혀 하지 않았다.
어느 전투기의 초기형은 밀폐식 방풍이었지만 파일럿들로부터「바람이 느껴지지 않는다」라는 불평(...)을 듣자 양산형은 개방식으로 되돌렸다. 그 때문에 모처럼의 고속 전투기가 엉망.
무기없이 싸울때 이탈리아군은 강하다(?) 소
말리아에 UN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을 때, 약간의 시비로 미 해병대와 이탈리아군 사이에 패싸움이 일어났다. 사건의 단초는
이탈리아군이 검문에서 통과시킨 소말리아인 용의자를 미 해병대가 연행하려고 하자 이탈리아군과 미 해병대간의 언쟁이 일어났고 이
틈을 본 소말리아인 용의자는 도망, 그것을 본 미 해병대원이 그 소말리아인을 사살. 이것을 계기로 패싸움.
양군 장교들이 이 패싸움을 수습했을 때에는 이탈리아군이 미국 해병대를 압도하고 있었다.
참고로 이탈리아 통일전쟁시 이탈리아의 반을 정복한 것은 정규군이 아니고, 가리발디의 의용군
머리회전이 빠른 이탈리아군 북아프리카에서 독일군이 영국의 패잔병 사냥을 하고 있었지만 영국군은 원주민 취락에 교묘하게 숨어들어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다. 독일군도 원주민 취락을 샅샅히 수색했지만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은 현지의 세력가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 영국군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면 설탕 5포대와 밀가루 5포대를 주겠다.」
다음날, 영국군은 전원 잡혔다.
상대의 발을 멈추기 위해 대연회 통일전쟁시 가리발디가 로마 해방을 위해 진군했을때의 일화.
로마 해방이 자신들의 사업에 영향을 준다고 판단한 이탈리아의 세력가들과 마피아는 가리발디의 침공을 늦추기 위해서 계책을 궁리했다. 가리발디와 그의 의용군을 초대하는 대연회를 개최했던 것이다.
코스요리의 시작은 훈제 햄으로부터 시작되어 메시나풍 생선 요리, 사슴고기, 어린양 통구이, 닭요리 등등 디저트에 도너츠나 구운
사과에 이르기까지 총 12 접시가 나오는 매우 호화로운 것이었고 게다가 이것이 일주일간 계속되었다. 이것에 눈이멀어 발이
묶여버린 가리발디는 정부군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고 고전, 결국 협상할수밖에 없었다.
와인 대전기 이탈리아군에서 보급한 와인의 표지엔「전투중 단숨에 들이키면 만취되어 전투도 두렵지 않다!」라고 써 있었다. 또 물자 비축은 탄약보다 와인이 많았다.
포로가 된 이탈리아인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독일, 일본, 이탈리아의 3개국군의 포로가 수용된 수용소가 있었다. 독일군 포로들은 집단을 이뤄 땅굴을 파 수용소에서 탈주하려고 시도했고 일본군 포로들은 집단으로 자결해버렸다.
하지만 이탈리아군 포로는 수용소의 문이 필요없을 정도로 점잖았고 개중엔 근처의 아가씨까지 헌팅해 애인을 만든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사막에서 구원 요청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과 싸울 때, 이탈리아군 부대로부터 구원 요청이 들어와 독일군 부대는 전력을 다해 그들을 구원하러 향했다. 그러나......바로 그 이탈리아군은 사막에서 귀중한 물을 사용해 파스타를 데치고 있었다.
음식이라면 역시 이탈리아인 전장에서도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없을까........그 일념하에 동결건조 기법이 이탈리아인에 의해 발명되었다. 연합국측도 매우 놀랐다고 전해진......orz
포로에게도 풀코스 말
타 공방전시 방공전에서 격추된 영국군 파일럿이 해상에서 이탈리아 해군에 포로로 잡혀 이탈리아 본토로 이송되었다. 밤이
되고.......감옥에 들어온 그에게 저녁 식사가 들어왔는데 이것은 파스타에 고기 요리, 식후에는 과일에 와인까지 한잔 따라오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호화로운 식사. 장교라곤 해도 말타에서 보급이 끊겨 매일 형편없는 식사만을 해왔던 RAF 파일럿은 생각했다.
「.........훗.........이것이 최후의 만찬이라는 것인가.....」
내
일은 총살된다.......라고 생각하고 맛있게 음식을 비우고 맞이한 이튿날 아침, 그가 수감된 감옥 문앞에 고위 장교가 당번병을
동반하고 나타났다. 이 장교가 총살을 집행하는 녀석인가(?) - 라고 생각한 영국군 파일럿 앞에 그 장교가 무슨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행인 당번병이 통역했다.
「 어제는 사소한 행정착오로 장교인 귀관에게 일반 병사용 식사를 공급해버렸다.
나의 명예를 걸고 말하건데 우리는 제네바 협정을 준수할 것이며........(이하중략)..........하여튼 포로를 학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 나의 얼굴을 봐 어제의 실례를 용서해주지 않겠는가?」
오랫만에 재미있게 한 게임이였다. 장르는 액션 어드벤쳐. 아직 신화와 현실이 구분되지 않던 시대를 배경으로, 스파르타의 장군이었던
스킨헤드에 염소수염에 근육질에 문신에 흉포하기 짝이 없는 주인공이, 그리스신들의 전폭적인 후원을 등에 업고, 살벌한 무기를 말 그대로
사방팔방으로 휘둘러 적들을 도륙해나가는 와중에 길을 가로막는 퍼즐도 풀며 목표를 이루어 나가는 게임이다. 나레이션이 깔리면서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오프닝이 강렬하다. 튜토리얼을 겸한 초반부 진행이 무척 잘 짜여있어서 이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 나도 어느새
빠져들어서 손에 땀을 쥐고 다음을 기대하게 되었다. 여러가지 액션연출은 박력넘치고 통쾌하다. 아이템 하나를 얻을때도, 힘들게
돌문 하나를 들어올려 열때도 주인공의 온 몸의 혈관이 불끈 솟아오를것 같고 전투는 경쾌하고 짜릿하다. 신들이 부여해준 힘을
이용해서 좀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수도 있고, 그냥 묵묵히 적을 찢어죽일지 두들겨패서 죽일지를 결정하며 적을물리칠수도 있다.
미노타우르스와 힘겨루기를 한 끝에 목구멍에 검을 꽃아넣고, 메두사의 목을 꺽은뒤 뽑아버리기도 한다. 퍼즐적인 요소와 액션이
적당히 섞인 보스전은 클리어 했을때의 만족감을 극대화 시켜준다. 초반에 히드라를 잡았을때의 짜릿함은 아직도 잊을수 없다.
이 장르를 싫어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바로 '의미없는 퍼즐과 액션'때문이다. 아무 이유도 없이 저곳에 있는 아이템을 이곳에 있는
아이템과 합한뒤 자꾸 떨어지게하는 공중 발판을 뛰어서 도달한 막힌문에 사용하면 길이 열리는 따위의 퍼즐은 정말 짜증난다. 하지만 이게임의
퍼즐은 그런것이 아니다. 히드라의 본체를 치기위해서는 작은 히드라를 물리치고 나아가야 하지만 자꾸 회복되는 작은히드라의 목은
결코 일반적인 공격만으로는 물리칠수가 없다. 몇번의 시행착오를 겪고(짜증나지 않을정도의 도전욕구를 자극하는 정도의 시행착오만
겪게 밸런스를 맞추어놓았다)난 후에 주변의 지형지물을 관찰한다. 발상의 전환을 통해 그것을 적절히 활용해서야 작은 히드라의 목을
저지할수 있다.
액션과 퍼즐의 적절한 조화, 무난하지만 성취감있는 스토리,괜찮은 그래픽 이것들이 전부 잘 이루어져서 만들어낸 +@가 나를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좋은 게임이다. 2편이 나왔다는데 기회가 되면 해볼까 싶다.
정말 작고 잘 빠졌다. 지하철에서 샘플 동영상을 보는데 화질이 너무 좋아서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D클릭은 딸깍딸깍 재밌다- 예약구매 사은품 없다더만 젠하이저 헤드폰 px100 줘서 기분 좋았다~ 헤드폰 많으니 이걸 팔면 또 3만원이 굳는단 말이지. 근데 아이리버 이렇게 팔아서 남는게 있냐;;
1.컴퓨터를 켠다. 2.컴퓨터로 적당히 무언가를 하고 있으면 고양이가 모니터 위로 휙 하고 뛰어 올라온다. LCD는 곤란하다. 17인치 CRT모니터도 괜찮지만 넉넉한 19인치 모니터를 추천한다. 3.모니터위에서 쳐다보거나, 자거나 잠꼬대를 하거나 하는 고양이를 가끔 쓰다듬어 주고 사진도 찍어주자. 자다가 모니터에서 떨어지는 일이 생기면 당황하거나 웃지말고(고양이가 크게 상처받을 수도 있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모니터위로 올려주고 쓰다듬어 준다. 4.잘시간이 되면 잠자리를 마련하고 모니터의 열로 따뜻해진 고양이를 이불속에 데려와 안고 잔다. 5.이불속 온도가 너무 높아지면 고양이는자동으로 이불밖으로 나가고, 방온도가 내려갔을 경우에는 이불속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적절한 난방이 유지된다.(자동온도조절기능)
예전에는 Yesterday나 Let it be 정도밖에 모를때가 있었지만 요즘 한창 들으면 들을수록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어떤 평론가가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현대 음악의 90%는 이미 비틀즈가 40년 전에 실험해보았고 매번 그 점수는 90 점 이상이었다고도 하니 요즘의 뮤지션들은 정말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참신한 기법이라 생각하고 나름대로 그럴싸한 곡을 써서누군가에게 들려주었는데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전설적인 그룹이 썻었던 곡과 비슷하다는 평을 들었다고 생각해보라..
대부분의 청중이 자신들을 모른다고 해서 섭섭해하지말것, 대부분의 청중이 자신들을 이름을 안다면 오프닝으로 세우지 않는다.
레퍼토리에 지난세월에 유행한 가요의 리메이크를 하나 넣고, 유명한 곡의 카피도 넣는다. 자작곡은 어차피 아는 사람이 없거나 적을터이니 단순한 구성으로 된것을 넣는다. 물른 곡들은 분위기를 '적당히' 띄우는 곡들이어야 하며 그에 맞는 오버하지 않는 액션도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
자신들이 오프닝밴드임을 자각하고 있어야 하나 청중에게 그것을 깊이 인식시킬필요는 없다. 밴드의 본분을 다한다면 청중은 즐거워할 것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4곡정도의 공연이 끝나고 예의상 혹은 정말로 앵콜요청이 들어와도 그것을 '정중히' 거절해야한다는 점이다. 메인공연을 언급하면 효과적이다.
메인공연 짬짬히 분위기를 띄우는데 협조한다면 거의 완벽한 오프닝밴드! 연주와 곡이 마음에 든 일부청중이 다른 곡들을 들을수 있는 방법을 물어볼지도 모르니 홍보수단도 항상 준비해 둘 것.
1.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다. 나는 꽤 성실한 학생이라 수업을 열심히 듣는다. 하지만 주변의 학생들이 수업시간중에 나에게 수업내용중에 이해가 가지 않는 무엇인가를 물어보면 그것에 답해주느라 선생님에게 지적을 받게 되었다. 서서 수업을 들으라는 벌도 받게 되었다. 새침한 여자 선생님은 꽤 화가 나셨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지않고 수업내용을 잠시 알려준것이 잘못한일인가 하고 생각해서 서서도 즐겁게 수업을 받는다. 그런 내 모습을 보는 선생님은 더 화가 나신 눈치이다. 그런 일이 몇번인가 계속되고 불량학생으로 오해를 받게 되자 나는 어떻하면 선생님이 내가 착한 아이인줄 알아주실지 고민한다.
2.방과후에 집에 오니 내 방에 뱀이 나타났다.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제법 큰 녀석인것 같다.넓은 그 방을 같이 사용하는 동생과 나는 뱀의 독에 대한 두려움때문에 뱀을 잡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방을 사용하지 않을수도 없고 해서 몇일정도를 불편하게 지내다가 드디어 뱀을 잡기로 마음먹었다. 동생은 식칼, 나는 야구 방망이를 들고 뱀이 숨어있을만한 구석을 들쑤시니 과연 뱀이 스스륵 움직인다. 도망치는 뱀을 쫓아가며 몇번정도 뱀을 친것 같기도 한데 때렸다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뱀을 다시 보니 뱀이 아니라 고양이 같기도 한데 저 번쩍이는 비늘은 뱀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도망치는 뱀이 우리에게 왔다. 발목을 깨물린것 같아서 이제 죽을지도 모르겠구나 하고 앉아있는데, 이 뱀 하는 요량이 이상하다. 왜 내 발목에 몸을 부비는 걸까.. 자세히 보니 아기고양이인데 등쪽에 뱀 비늘 같은게 나 있을 뿐이였다. 다행히 크게 다친곳이 없었다. 병원에 데려갔다 오며 동생과 나는 고양이의 처우를 생각하다 결국 우리집의 두번째 고양이로 키우기로 했다.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두려움은 진실을 보는 눈을 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