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날 학교의 부름을 받아 3시간 넘게 육체노동을 하고는 잠이 안오던 밤에
자전거 타시는 학교샘과 채팅으로 오전에 둘이서 대구대근처를 돌아보기로 했다.
영남대에서 대구대까지는 15km정도 30분 조금 넘는 평지라 몸풀기 딱 좋은 거리다.
대구대근처에서 만나 음료수와 초코바를 하나씩 사고는 출발~
길아는 샘이 앞에서 나는 뒤에서 슬슬 가는데..앞차는 MTB고 나는 싸이클이라 안그래도 속도차이가 나는데 친절하게 앞에서 바람까지 막아줘서 설렁설렁 편하게 달릴수 있었다.
길은 한적한 시골길이였는데 느긋하게 달리기 좋았다.
중간에 오르막이 딱 하나 있었는데 3분도 안걸려서 올라가는 길이었다.
새로산 고글을 끼고 탓는데 그리 어지럽지도 않고 내리막에서도 역광에서도 눈이 무척 편해서 만족했다.
점심을 먹고 헤어진뒤에 집에 돌아와서 시원하게 씻고 잠시 쉰다고 누웠는데 피곤했는지 다섯시간이나 잠들어버렸었다.
요즘 체력이 많이 떨어진게 확실하다. 주말마다 짧게라도 꼬박꼬박 타야겠다.
시험기간이라 도서관은 토요일 개관을 했다. 평소에는 정장을 입고 일하지만 오늘은 편하게 입고 자전거를 타고 출근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15KM정도고 30분조금 넘게 걸린다. 자전거를 타고 출근해서 퇴근하고..기차역에 볼 일이 있어서 다녀왔다. 오늘 날씨는 거의 초여름 날씨라-1시간 30분 정도 자전거를 타고 나니 몸이 제법 달아올랐다.
집에 돌아와 보일러를 틀지 않고 샤워를 해 봤다. 운동으로 인해 감각이 예민해진 몸에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내린다. 햇볕에 달아오은 피부가 식는다. 근육이 식는다. 1분만에 보일러를 켜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비누칠을 하고 헹궜다.
적당한 운동으로 각성된 몸에 차가운 물로 정신까지 또렸해졌다. 눈이 밝아졌다. 코가 뚫렸다. 귀가 트였다. 입이 무거워졌다. 머리는 차지만 끊임없이 작동한다. 무엇이든 배우고 익힐 수 있을 것 같고,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최고다.
그래서 좋아하는 중화요리가게에서 요리를 포장해와서 맥주와 함께 먹으며 웹서핑을 하고 있다능...
슬슬 시즌이고 해서 몸도 풀 겸 당일치기로 어디론가 다녀오기로 했다. 때마침 청도 소싸움축제기간이라 청도를 선택했는대 그것이 비극의 시작일줄이야 누가알았으ㄹ...
샵에 들러 물통게이지를 달고 출발- 반팔이라 바람이 약간 쌀쌀한듯 했지만 볕이 따스해서 탈만했다. 슬슬 가다보니 와인터널이라는 표지판이 보이길래 들렀더니..
조명장식
이런 별천지가 나온다. 사용안하는 터널을 와인저장고로 사용하고 있었다. 청도에서 나는 감으로 만든 와인을 팔고 있었는데 마실만했다. 막힌 터널이라 내부는 습했다. 선선한 여름 저녁에 들어가서 한잔 마시면 꽤 괜찮을 듯 했다. 관련사이트http://www.gamwine.com/tunnel/t1.php
가는 길에 청도 소싸움축제에 들러서 한경기 보고 가려고 했으나 첫째날이라 그런지 차도 막히고 사람도 많고 결정적으로 입장료가 5,000원이라 발걸음을 돌렸다. 진주에 있을때는 소싸움 같은건 자전거타고 지나가는길에 잠시 들러서 한가하게 보곤해서 이런 분위기는 왠지 그랬다. 원래 장날에나 하고 했으니 이런 분위기가 당연하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소싸움은 그랬다.
청도는 한가했다. 원래 한가한 동네일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사람들이 거진 소싸움을 보러가서 시내는 텅텅 비어 있었다. 시장에 들러서 국밥 한그릇 먹는데 국한그릇에 소주 한병 시켜놓고 시간을 보내는 어르신들이 좀 있었고, 좀있다가 온 아저씨는 소주한병을 시켜놓고는 카운터위에 술병을 놓고 마시면서 옆에 있는 식당의 험담을 했다. 옆집 식당 아주머니가 와서 드세게 항의하며 시끄러워 질때쯤에 나왔다.
역앞에서 감말랭이(곶감과 비슷하게 감을 말린것)를 한봉다리 사서 먹으면서 좀 둘러보는 중에 도서관 팻말이 보이길래 가보는길에 마트앞에서 자전거 여행자 두명이 보였다. 등에 커다란 배낭을 메고 이것저것 주렁주렁 메달고 피부가 뽀얀 모양새를 보니 초짜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까지 가냐고 물어보니 군대전역하고 나서 정처없이 돌아보려고 한단다. 목적이 없는건 좋지만 준비는 좀 더 알아봤으면 좋았을걸.. 몸이 좀 더 고생하면 될일이긴 하지만 그들의 원활한 여정을 위해 빨리 짐받이를 살것을 권하고 생각나는대로 몇가지를 충고해 주었다.(짐을 최대한 줄이고, 안전이 제일 중요, 전라도가 둘러보기 좋다는 둥)오늘 출발해서 밀양까지 간다고 해서 순간 같이 가고 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참았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통성명을 하고 같이 갔겠지만 지금 그들과 나는 여행의 속도가 다르다. 조심해서 다니라고 하고 헤어졌다. 잠깐 마주친 사이지만 왜 그리 아쉬웠던지 두번이나 더 뒤돌아 보았다.
소싸움은 못찍었지만 청도에 있던 동상은 찍었다.
새로운 동반자
적당히 쉬다가 학교앞 분식점에서(무려 털보네 럭셔리 분식)핫도그를 하나 사먹었는데 초등학교때 가끔 먹었던 '켄터키 핫도그'맛이 났다. 종이 포장안에 싸여 있는걸 전자렌지에 돌리면 싸구려 소세지냄새와 고소한 빵냄세가 진하게 식욕을 돋우고.. 한입 먹으면 따끈하고 눅눅하고 약간 단 빵껍질이 부드러운..
귀여운 버스 정류장
딱히 더 돌아볼곳도 없어서 집으로 향했다. 역에서 받은 관광용 지도를 보고 갈길을 정한것이 오늘의 고생문이었다. 관광용 그림지도라 내가 선택한 지방도는 간략하게 그려져 있길래 그런가 보다 하고 갔다. 첫번째 오르막은 그럭저럭 힘내서 넘었다. 문제는 두번째였다. 지방도가 지방도인 이유는 길이 험하기 때문이다. 국도는 대부분 평지로 다니고 왠만하면 굴곡을 주거나 터널을 뚫지만 지방도는 그런거 없다.
사정없이 뻗은 오르막에 자전거를 좀 타다가 좀 걷다가 쉬다가의 반복이었다. 생각해보면 예전의 체력이였으면 힘들어도 그럭저럭 넘었을것 같은데 지금은 1년이나 쉬었고 기어도 높아서 고전했었다. 내리막길로 경사가 가파르기 마찬가지여서 브레이크 잡기 급했다.
내리막 뒤로는 별다른 일없이 봄을 느끼며 설렁설렁 집으로 왔다. 집에 오니 계속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서 잘먹고 잘 쉬고 싶었지만...컴퓨터를 손보느라 늦게 잤다. 몸이 흥분해서 잠이 안오기도 했다.
비를 걱정하며 잠들었는데 다행히 아침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집근처 식당에서 밥을 사먹고 경주를 향해 출발. 부산에서 경주까지는 몇 번이나 가본 코스라 지도도 필요 없다. 부산에서 양산을 거쳐 언양을 통해 경주까지 가는 길은 거리가 80km 정도, 오르막도 10분 내외의 짧은 것 두 개 뿐인 평탄한 길이라서 첫날코스로는 제격이다. 비만 안온다면야...
언양의 초등학교 벤치에 누워서
양산으로 넘어가는 오르막입구에 도착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작년과 똑같다. 짐에 방수조치-준비해간쓰레기봉투에싸맨다-를 한 뒤 속으로 욕을 해가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내려갈때는 전부 흠뻑 젖어서 질퍽질퍽해졌다. 비는 우리를 따라왔다. 비가 쉬고 조금 날씨가 좋아져서 좀 쉬었다 갈라치면 어김없이 내리기 시작했다. 초등학교에서 밥을 해먹고 나서도 그랬고 짬짬이 쉴 때도 그랬다. 북쪽으로 도망쳤던 우리는 결국 경주에서 비에 따라잡혔다.
비를 맞고 달려 젖은 날은 찜질방에서 잘 쉬는게 좋다. 경주에 도착하니 시간이 제법 일러서 첫날은 무리하면 안좋음에도 불구하고 -일정이 빠듯하고, 의외로 지용이가 잘 달리고, 비때문에 관광은 포기, 이왕 젖은것 경주에서 포항까지는 얼마 안 되- 하는 이유로 좀 더 달려서 포항에서 묵기로 했다.
비가 좀 멎었다 싶어서 탈해릉에서 양갱을 먹으며 쉬었다가 출발했다. 그리고 20분 뒤부터는 폭우속에서 옆에 트럭이 한대 지나갈때마다 말 그대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물을 뒤집어 쓰는 사태가 연이어 발생했다. 이미 길로 나서서 돌아가기도 그런 위치. 낙장불입을 생각하며 내가 수영을 하는건지 자전거를 타는건지 구분하려고 노력했다. 긍정적인 사고를 잃지 않으려고 했다. 시원한것이 찌르는 듯한 땡볕에서 땀을 한말씩 흘리는 것보다 낫지않은가-아마 땡볕이었다면 적어도 비맞는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할것이다.
자전거 여행을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무섭지 않냐고 물어본다. 무섭다. 차에 치여 내장을 드러낸체 길바닥에 누워있는 생명들을 볼때마다 나도 조금만 실수하면 저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펑크가 무섭다. 국도가 무섭다. 짐을 수십톤씩 싣고 질주하는 트럭이 그 풍압에 나를 휘청거리게 하는게 무섭다. 운전자들의 시야를 흐리게 하고 바퀴를 미끄러트리는 비가 무섭다. 60킬로로 달리게 해주지만 돌 하나만 잘못 밟으면 공중부양을 체험하게 해줄 내리막이 무섭다. 집에 있었으면 사고확률도 낮고 편했을 것을. 나는 왜 나섰을까.
뒤에 누군가 따라오고 있다는 생각이 나의 반을 지탱했다. 혼자였다면 절대로 달릴수 없었던 시간들을 지나 포항에 도착했다. 비는 멎어있었다. ㅅㅂ 물어물어 찜질방을 찾고 어디에나 있는 여행자들의 친구 김밥천국에서 저녁을 먹었다. 씻고 빨래를 하고 일기예보를 봤지만 내일 날씨를 걱정하며 힘들게 잠들었다.
기상청은 언제나처럼 사상최악의 더위가 올것이라 했지만 장마가 일찍 와서 늦게가고 그 뒤로도 자주 비가 내려서 여름같지 않은 여름이었다. 몽골행을 취소하고 한자공부에 7월 한달을 다 바친 뒤, 슬슬 더워지려는 8월은 도서관에서 이런 저런 책들을 읽으며 지내다 조용히 여름을 넘기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떠나고 싶은 마음은 고양이처럼-언제왔는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다가와 나를 감쌋다. 작년에 가지 못했던 동해안이 아쉬워서일까, 여행간다는 친구에게 같이가자고 연락하고 고양이를 맡아줄 후배를 포섭하고 부족한 장비몇가지를 사고 코스를 정하고 등등 모든준비들을 하루저녁사이에 해치웠다. 남은것은 친구가 부산으로 오는것과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코스는 부산에서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서 적당히 내륙을 타고 내려오는 코스. 정말 별 생각없었다. 그저 바람을 맞으며 달릴수만 있다면 즐겁게 달릴수 있다는 좋겠다는 생각말고는.
덧.작년 여행기는 결국 쓰지 못했는데 혹시 기대하셨던 분들께 심심한 사과의 말을 올립니다. 언젠가는 쓰겠습니다. 일단 저번주의 이야기 부터 잊어버리기 전에-
개교기념일 모임 이후 금요일모임에 참석하기로 했었다. 12시에 4명이 모여서 구월산으로 출발- 구월산은 부산대학교에서 보면 바로 앞에 버티고 있는 산이다. 작년에 한번 간적이 있었기에 조금 여유었지만 초입의 조금만 방심하면 자전거가 뒤로 넘어질것 같은 정도의 급경사는 여전히 힘들었다. 임도를 오르고 힘들어 하고 조심조심 가끔은 속도를 내어 울퉁불퉁한 산길을 내려가기도 했다. 오늘 코스는 정상까지!
끌바(자전거를 탈수 없는 지형에서 끌고 가는것)와 들바(자전거를 끌수도 없는 지형에서 들고 가는것)를 번갈아 하며 가파른 산길을 올랐다. 산림감시공익요원으로 근무하며 산길에는 나름 단련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오랫만이라 그런지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래도 정상은 우리를 기다려주었고 결국 도착. 바람을 맞으며 속세를 좀 내려다 보다가 하산하기 시작했다..신나는 다운힐!! 이 아니라 이건 뭐..미친놈도 아니고 자전거를 타고 급경사길을 내려가기 시작한 순간 내가 왜 이런 비상식적인 짓을 하고 있는건지하고 살짝 회의가 들었지만 곧 생각할 여유는 사라졌다. 내가 가진 기량과 반사신경을 다 동원해서 등산로를 내려가는데 분명히 넘어질것 같은데 여기서는 넘어질것 같은 느낌인데 그러면서도 안넘지고 용케 균형을 잡으며 나무뿌리를 넘고 큰 돌을 피하고 어찌어찌 용케 내려갔다. 롤러코스터는 비교도 안되는 짜릿함.
임도를 따라 내려가면서 약간 속도를 내다가 자갈밭에서 미끄러져 앞으로 넘어졌다. 장갑덕분에 손은 안다쳣고 왼쪽무릎이 살짝 까지고 오른쪽 정강이가 찍힌 정도라 다행이다. 그러게 까불면 안된대도.
점심으로 밀면을 먹고 약간 아쉬운 감에 학교를 한번 올랐다가 집에와서 씻었다. 이제 찬물로 샤워할수 있는 계절이다.
폰카로 찍은 사진
MTB의 탄생과 보급 1970년대 캘리포니아에서 개발되어 하이브리드형과 함께 21세기형 탈것으로 월간 바이시클라이프(2003년 3월호)
게리 피셔를 비롯한 젊은이들이 1970년대에 캘리포니아 산속을 달리면서 개발한
마운틴바이크(MTB)는 자전거 세계를 크게 바꿔 놓았다. MTB는 이어서 하이브리드형까지 나오게 해서 자전거를 튼튼하면서 타기
편한 것으로 만들었다. 산길과 비포장도로까지 활동범위를 넓힌 MTB와 하이브리드형은 자전거의 실용성을 크게 높이며 21세기형
탈것으로 떠오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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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100년 동안의 자전거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은 마운틴바이크(MTB)의 등장이다. 1970년대 중반 원형이 나타나
80년대에 MTB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은 새 탈것은 편리한 하이브리드형도 탄생시켜, 자전거가 90년대에 큰 붐을 이루며
21세기형 탈것으로 떠오르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20세기 들어와 자전거는 크게 보급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가볍고 속도가 빠른 로드형과 실용자전거로, 모두 포장도로를 달리는 데
어울리게 만들어졌다. 새로운 MTB의 등장으로 자전거는 산길과 비포장도로까지 달리면서 활용범위를 넓혀주었다.
‘MTB의 아버지’ 게리 피셔와 요람 탬산
MTB는 자전거를 더욱 쓸모 있고 사랑받는 탈것으로 만들었다. 미국에서 탄생한 MTB 개발에서 결정적인 구실을 한 이가
‘MTB의 아버지’라 불리는 게리 피셔(Gary Fisher)이고, 요람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북쪽에 자리한 마린카운티의
탬산(Mt. Tam)이다.
샌프란시스코 금문교를 지나 도심에서 20km 떨어진 곳에 있는 탬산(공식이름은 Mt. Tamalpais)은 784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경치가 좋아 많은 등산객이 찾는 명소다. 1960년대 말, 소방관들이 다니는 산속 길을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색다른
자전거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협곡일당(canyongang)이라 불리는 이들은 1930년대에 처음 대형 타이어를 달고 튼튼한
구조로 나와 사랑받았던 스윈 엑셀시오를 조금 손본 뒤 험하게 산길을 내달렸다(협곡 일당에 관해서는 본지 2002년 12월호에
실린 게리 피셔 칼럼 ‘MTB 발상지 마린카운티의 라이더 vs 등산객’을, 탬산의 현재상황은 2003년 10월호의 ‘MTB
탄생지 탬산을 가다’를 참조). 이들은 탬산 꼭대기에서 계곡까지 자전거로 레이스를 즐겼고, 오를 수 있는 길은 어디든 다
다녔다. 게리 피셔는 70년대에 이들에 합류했다. 이 무렵 조금 손을 본 자전거는 클렁커(klunker, 또는 clunker)라
불렸다.
1950년 마린카운티에서 태어난 피셔는 12세에 자전거 레이스를 시작했고 14세 때는 경기시즌이 끝난 뒤 험로를 달리는
사이클로크로스 레이스에도 출전했다. 68년 18세이던 그는 장발 때문에 레이스 출전을 거부당하기도 했다(68년 해제). 그는
로드와 트랙 레이스에서 좋은 성적을 올려 한때 미국 올림픽팀 후보선수로 꼽혔다.
게리 피셔와 친구들의 탬산 라이딩에서 가장 이름난 것이 산길을 빠른 속도로 내려가는 ‘다운힐’이었다. 변속기가 없고 브레이크도
페달을 거꾸로 밟아 감속하는 코스터형이어서 초기 클렁커들은 쉽게 망가졌다. 특히 브레이크가 과열되어 레이스가 끝나면 그리스를
‘다시 칠해야(repack)’ 해서 다운힐 대신 ‘리팩 레이스(Repack race)’라 불렸다. 피셔는 이 레이스를 위해
1974년 튼튼한 프레임을 쓰면서 뒷바퀴에 5단 변속기와 대형 브레이크를 갖춘 클렁커를 만들었다. MTB의 원형이 된 피셔의 새
자전거는 인기를 모았다.
탬산에서 젊은 라이더들이 벌이던 리팩 레이스가 공식으로 열린 것은 1976년 10월이었다. 탬산 속 파인산(537m)의 산길에서
표고차 400m, 길이 3.4km 코스를 다운힐하는 경기였다. 이 레이스는 71년부터 피셔의 룸메이트로 뒤에 피셔와 함께 MTB
제작회사를 세우는 찰리 켈리가 마련했다. 피셔보다 5세 위인 켈리는 몸무게가 91kg을 넘어 자전거 달리기도 했지만 레이스 주관
등에 큰 열의를 보였다. 1회 때는 7명이, 1주일 뒤에 열린 2회에는 9명이 출전했다. 이 해에는 9회, 77년에는 8회,
78년 3회, 79년 2회가 열렸고 MTB가 제대로 나오던 83년과 84년에는 각 1회로 위험한 리팩 레이스는 막을 내렸다.
1회 대회에는 출전하지 않았던 피셔는 그 뒤 모두 4회 우승했다. 그는 77년에 열린 레이스에서 4분22초의 코스기록으로
우승했다. 평균시속 46.7km의 스피드로, 이 기록은 그 뒤에도 깨지지 않았다. 2위 기록은 2초 뒤진 조 브리즈였고, 그는
10회 우승했다.
레이스 때마다 클렁커의 말썽으로 중도탈락하는 이가 많았다. 리팩 레이스에서는 라이더의 달리는 솜씨가 승패를 갈랐고 프레임,
변속기, 브레이크와 그 조작방법, 핸들 등에서 누군가가 조금 새로운 것을 쓰면 모두 다투어 모방했다. 리팩 레이스는 MTB를
위한 또 하나의 요람이었다. 이 레이스가 없었으면 MTB는 다른 모양이 될 수 있었고, 또 공식 등장이나 보급시기도 훨씬 뒤졌을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74년의 리팩 레이스용 자전거에 이어 피셔는 75년 개량형을 만들고 다음해에는 판매용 클렁커를 꾸몄다. 이들 모델의 바퀴는
26×2.125인치로 뒤에 MTB의 업계 표준이 되었다. 그뒤 피셔와 켈리는 조 브리즈와 톰 리치 등 뛰어난 레이서인 젊은
프레임 제작자에게도 프레임을 부탁해서 클렁커를 만들어, 일부는 팔고 하나둘 자신이 타기도 했다. 마린카운티에서 젊은이들이 만든
클렁커는 76년 20~100대, 77년과 78년은 각각 100대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모두 스윈 자전거를 개조하거나 요즘
MTB와 비슷한 새로운 프레임으로 꾸민 것들이다.
1979년 마운틴바이크사에서 판매 시작
튼튼한 프레임, 다단 변속기, 말 잘 듣는 강력한 브레이크, 직선형에 가까운 핸들, 대형 타이어로 꾸며진 클렁커들이 인기를 얻자
피셔와 켈리는 1979년 마운틴바이크(MountainBike)사를 세워 신형 자전거를 팔기 시작했다. 이 때가 공식적으로는 처음
MTB가 등장한 것으로, 첫해에 160대, 80년에는 1천대가 팔렸다. 미국에서 MTB 판매는 79년 200대, 80년
300대, 81년 2천대였고 82년에는 대량생산된 모델이 등장해 5천대로 늘어난 뒤 83년에는 5만대로 급증했다.
산악자전거를 뜻하는 마운틴바이크라는 말은 1869년 독일의 한 잡지가 커다란 기구의 도움을 받으면서 산길을 오르는 자전거 그림을
싣고 Gebirgevelocipede(mountain bike)라고 설명한 데서 비롯되었다. 1970년대 중반 캘리포니아에서
클렁커를 타던 히피가 마운틴바이크라 불렀고, 이 말을 들은 어느 영업사원이 78년 찰리 켈리에게 제품에 이 이름을 쓰라고 해서
켈리와 피셔는 다음해 회사를 세우면서 MountainBike라 이름지었다.
켈리는 1980년 변호사를 통해 마운틴바이크를 상표로 등록하기로 했다. 심사관은 이 탈것이 “산에서만 타는 것인가?”하고 물어 변호사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아 상표등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저전거 전문지 ‘Bicycling’은 마운틴바이크가 알맞은 이름이 아니라면서 새 이름을 공모했다. 이때 생긴 것이 ATB(All
Terrain Bicycle)로, 이 월간지는 ATB를 고집하여 3~4년 동안 혼란이 왔으나 애호가들은 MTB쪽을 좋아해서
일반화되었다.
MTB의 초기 바람에 재빠른 반응을 보인 업체는 일본의 시마노다. 1981년 샌프란시스코 근방에서 이상한 자전거들이 무리지어
달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미국시장 담당이던 현 회장 시마노 요시조는 현지를 찾아, 산길을 즐겁게 내달리는 젊은이들이 “자주
말썽 나서 야단이다. 튼튼한 부품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 MTB의 앞날을 내다보았다. 그는 힘들게 본사측을 설득하여
부품 개발에 착수해서 82년 전용부품인 데오레 XT를 내놓았다. 유럽의 이름난 메이커들이 MTB 바람을 ‘한때’의 유행으로 여겨
외면했던 것도 시마노가 MTB 부품업계에서 독주하는 요인이 되었다. 로드형에서도 유명부품을 섞어 쓰는 일이 있었으나 MTB 등장
뒤 성능과 품질을 인정받은 부품을 모아 완성차를 내놓는 일이 상식이 되었다.
게리 피셔를 비롯한 여러 명의 클렁커 라이더들의 힘으로 완성된 MTB는 80년대에 미국에서 시민권을 얻고 세계적으로 번져갔다.
미국에서는 83년 전체 자전거 판매량의 5%뿐이던 MTB가 93년에는 95%로 늘어났다. 여기에는 튼튼하고 자세도 편한 MTB와
가볍고 경쾌하게 달리는 로드형의 장점을 절충한 하이브리드형이 90년대에 큰 인기를 얻은 것도 큰 힘이 되었다.
83년에는 미국오프로드자전거협회(NORBA)가 발족되고 뒤이어 국제산악자전거협회(IMBA)도 태어났다. MTB는 1990년
국제자전거연맹이 공식 인정해서 첫 MTB 세계선수권경기도 열렸다. 세계적인 열기로 96년 애틀란타올림픽 때 MTB는 시범종목이
된 뒤, 2000년에 열린 시드니올림픽에서는 공식종목으로 경기가 진행되었다.
MTB와 이어서 등장한 하이브리드형은 자전거를 더욱 편리하고 실용성 높은 탈것으로 떠올렸다. 이들이 90년대의 새로운 자전거
바람의 바탕이 되었고, 이 바람은 연료가 필요 없고 공해도 없는 교통수단인 자전거를 건강과도 결부시켜 21세기형 탈것이 되게
했다.
이같은 MTB의 밝은 앞날을 바라보면서 MTB 개발과 완성에서 주역으로 활동한 일꾼들은 모두 자전거에 연관된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있다. 이제 53세가 된 1등공신 게리 피셔는 ‘게리 피셔 바이시클’을 운영하면서 레이싱팀을 갖고 스스로도 힘든 레이스에
직접 뛰어들고 있다. 리팩 레이스의 주역 찰리 켈리는 필자로 크게 이름을 떨치고 있고, 조 브리즈는 ‘브리즈 바이시클’의
사장이다. 뛰어난 프레임 제작으로 크게 공헌한 톰 리치도 ‘리치 디자인회사’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Gary Fisher and Clark Natwick challenging Golden Gate Park’s log barricades in this December, 1975 event, just a week before the 1st ever US CycloCross Championships in Berkeley’sTilden Park. Photo by: Ray Stafford
5월14일 2시에 단골가게인 부산대학앞 자이언트 대리점에 바로 그(!) 게리 피셔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원래 일정은 서울과 대구만 가는것이었는데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회먹으러 부산까지 왔다고 한다. 1시 좀 넘어서부터 가서 소일거리러 한자를 외우며 기다렸지만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는 게리피셔. 좀 늦어진단다. 세시가 되어도 오지 않아서 가게앞에서 부자모 사람들과 분명 자전거를 타고 오느라 늦는거라는등 영양가없는 농담을 하고 있는데 다가오는 검은 밴! 그분이 오셨다!!!
차에서 내린 그에게 "굿 애프터 눈~"하고 인사를 건네고 악수를 했는데 참 크고 따뜻하더라- 홍보가 덜 되어서 10명 내외의 조촐한 인원이 그를 기다렸다. 가게 안으로 가서 기념 촬영도 하고 티셔츠에 사인도 받았다. 뭔가 말을 더 건네보고 싶었는데 뻘쭘한 분위기를 깰 수가 없었다. 그를 계속 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설레여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사람은 어째 또 산에서 자전거를 탈 생각을 다 했을꼬.. 자전거에 사인을 받았다. 그의 이름이 붙은 메이커의 자전거는 아니지만 산에서 달릴수 있는것이라면 다 그의 자식이 아닐까.
화려하고 강렬한 디자인으로 유명한 프라이멀 져지의 07년도 신상품! 이지만 뮤지션 시리즈는 얌전합니다. 다른 제품들을 보면 해골이 춤을 추고 번개가 내려치고 뭐 그런데.. 노틸러스에 샘플로 온 물건이 싸게 나왔고 자전거 색에 잘 맞을거 같아서 냉콤.. 살거 다사고 과연 몽골행 비행기값을 모을수 있을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