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 피천득 수필

지난 사월, 춘천(春川)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聖心) 여자 대학에 가 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출강(出講)한 일이 있었다. 힘드는 출강을 한 학기 하게 된 것은, 주 수녀님과 김 수녀님이 내 집에 오신 것에 대한 예의(禮儀)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事緣)이 있었다.


수십 년 전, 내가 열 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도표(동경, 東京)에 간 일이 있다. 어떤 분의 소개(紹介)로 사회 교육가(社會敎育家) M 선생 댁에 유숙(留宿)을 하게 되었다. 시바쿠(지구, 芝區)에 있는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 딸,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하녀도 서생(書生)도 없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아사코(조자, 朝子)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다. 그 집 뜰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고, 일년초(一年草) 꽃도 많았다. 내가 간 이튿날 아침, 아사코는 스위이트 피이를 따다가 화병에 담아, 내가 쓰게 된 책상 위에 놓아 주었다. 스위이트 피이는 아사코같이 어리고 귀여운 꽃이라고 생각하였다.


성심 여학원 소학교 일 학년인 아사코는 어느 토요일 오후, 나와 같이 저희 학교에까지 산보(散步)를 갔었다. 유치원(幼稚園)부터 학부(學部)까지 있는 카톨릭 교육 기관으로 유명한 이 여학원은, 시내에 있으면서 큰 목장(牧場)까지 가지고 있었다. 아사코는 자기 신장을 열고, 교실에서 신는 하얀 운동화를 보여 주었다.


내가 도쿄를 떠나던 날 아침, 아사코는 내 목을 안고 내 빰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離別)의 선물(膳物)로 주었다.


그 후, 십 년이 지나고 삼사 년이 더 지났다. 그 동안 나는, 국민 학교 일 학년 같은 예쁜 여자 아이를 보면 아사코 생각을 하였다.


내가 두 번째 도쿄에 갔던 것도 사월이었다. 도쿄역 가까운 데 여관(旅館)을 정하고 즉시 M 선생 댁을 찾아갔다. 아사코는 어느덧 청순(淸純)하고 세련(洗練)되어 보이는 영양(令孃)이 되어 있었다. 그 집 마당에 피어 있는 목련(木蓮)꽃과도 같이. 그 때, 그는 성심 여학원 영문과 3학년이었다. 나는 좀 서먹서먹했으나, 아사코는 나와의 재회(再會)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가끔 내 말을 해서 나의 존재(存在)를 기억(記憶)하고 있었나 보다.


그 날도 토요일이었다. 저녁 먹기 전에 같이 산보를 나갔다. 그리고, 계획(計劃)하지 않은 발걸음은 성심 여학원 쪽으로 옮겨져 갔다. 캠퍼스를 두루 거닐다가 돌아올 무렵, 나는 아사코 신장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고 나를 쳐다보다가, 교실에는 구두를 벗지 않고 그냥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뛰어가서 그 날 잊어버리고 교실에 두고 온 우산을 가지고 왔다. 지금도 나는 여자 우산을 볼 때면, 연두색이 고왔던 그 우산을 연상(聯想)한다. '셸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를 내가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사코의 우산 때문인가 한다. 아사코와 나는 밤 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가벼운 악수(握手)를 하고 헤어졌다. 새로 출판(出版)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歲月)'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다.


그 후 또 십여 년이 지났다. 그 동안 제 2차 세계 대전이 있었고, 우리 나라가 해방(解放)이 되고, 또 한국 전쟁이 있었다. 나는 어쩌다 아사코 생각을 하곤 했다. 결혼(結婚)은 하였을 것이요, 전쟁통에 어찌 되지나 았았나, 남편이 전사(戰死)하지나 않았나 하고 별별 생각을 다 하였다. 1954년, 처음 미국 가던 길에 나는 도쿄에 들러 M 선생 댁을 찾아갔다. 뜻밖에 그 동네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M 선생네는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었다. 선생 내외분은 흥분(興奮)된 얼굴로 나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한국(韓國)이 독립(獨立)이 되어서 무엇보다고 잘 됐다고 치하(致賀)하였다. 아사코는 전쟁이 끝난 후, 맥아더 사령부(司令部)에서 번역(飜譯) 일을 하고 있다가, 거기서 만난 일본인 2세와 결혼을 하고 따로 나서 산다는 것이었다. 아사코가 전쟁 미망인(未亡人)이 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2세와 결혼하였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만나고 싶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사코의 집으로 안내(案內)해 주었다.


뽀족 지붕에 뽀족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이십여 년 전 내가 아사코에게 준 동화책 겉장에 있는 집도 이런 집이었다.


"아! 이쁜 집! 우리, 이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아사코의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십 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코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뾰족 창문들이 있는 집이 아니라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百合)같이 시들어 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세월'이란 소설 이야기를 한 지 십 년이 더 지났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進駐軍) 장교(將校)라는 것을 뽐내는 사나이였다. 아사코와 나는 절을 몇 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週末)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景致)가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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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Robert Fulghum
 
 
해마다 정초가 되면 그 해에 지킬 신조를 쓰는 것이 나의 오랜 습관이다.

젊었을 때는 생각나는 것을 모조리 써넣으려 했기 때문에 새해의 신조가 여러 페이지에 걸치곤 했다. 마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존재의 의미에 관한 모든 갈증을 풀어주기라도 하는 양. 그래서 그것은 때로 '대법원의 훈령서' 같은 느낌을 줄 때조차 있었다.

요사이는 이 신조가 많이 짧아졌다. 때로는 냉소적이고, 때로는 익살맞고, 때로는 부드럽다.

나는 계속해서 연구하여 신조를 써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쉽고 간결한 말로 적어 한 페이지를 넘기지 않게되었다. 때묻지 않은 이상주의를 충분히 함축시켜서.

간결해야겠다는 영감은 어느 주유소에서 떠올랐다. 나는 내 낡은 차에 옥탄가 높은 최고급 휘발유를 가득 채워 넣었다. 그러자 이 오래된 굴타리차는 고급 휘발유가 부담스러워서 교차로를 돌때마다 털털거렸고 비탈을 내려갈 때는 쿨커덕쿨커덕 기침을 해댔다.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 마음과 영혼도 때때로 그렇게 된다는 것을. 고급 지식을 너무 많이 집어넣게 되면 그만 그것에 짓눌려서 선택이 필요한 인생의 교차로에서 번번이 털털거릴 것이다. 나는 너무 많이 알고 있거나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이다. '검토된 삶'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새해의 신조를 쓰며 나는 뜻있게 사는 데 필요한 것은 거의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며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난 그것을 안다. 그것도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는 것을 행하며 산다는 것은 글쎄, 그건 또 다른 문제이리라.

내 신조는 이렇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에 관해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것을 나는 유치원에서 배웠다.

지혜는 대학원의 산꼭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치원의 모래성 속에 있는 것이다. 내가 배운 것들이 바로 여기에있다.
 

-무엇이든지 나누어 가져라.

-정정당당하게 행동해라.

-남을 때리지 말아라.

-물건은 항상 제자리에 놓아라.

-네가 어지럽힌 것은 네가 깨끗이 치워라.

-남의 물건에 손대지 말아라.

-남의 마음을 상하게 했을 때는 미안하다고 말해라.

-화장실을 쓴 다음에는 물을 꼭 내려라.

-따뜻한 쿠키와 찬 우유가 몸에 좋다.

-균형잡힌 생활을 하라. 배우고 생각하고 날마다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놀기도 하고, 일도 하라.

-오후에는 낮잠을 자라.

-밖에 나가서는 차조심하고 손을 꼭 잡고 서로 의지하라.

-경이로운 일에 눈떠라. 컵에 든 작은 씨앗을 기억하라. 뿌리가 나고 새싹이 나서 자라지만 아무도 어떻게, 왜 그렇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다.

-금붕어와 애완용 쥐와 흰 쥐, 그리고 심지어 일회용 컵 안에 심어 놓은 작은 씨앗 조차도 모두 다 죽는다. 우리도마찬가지이고.

-그리고 그림동화책과 여러분이 태어나서 처음 익힌 가장 의미 있는 낱말인 '이것 봐(LOOK!)'를 기억하라.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이 이 속에 들어있다. 황금률과 사랑과 공중 도덕, 그리고 생태학과 정치학과 평등과 건전한 생활까지.

이들 항목에서 아무 것이나 하나를 골라 그것을 세련된 어른의 말로 고쳐서 여러분의 가정 생활, 직장, 정부 또는 세계에 적용해보라. 그러면 그것은 모든 경우에 들어맞고 분명해지고 확고해진다. 만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오후 세시쯤 쿠키와 우유를 먹고 나서 담요를 덮고 낮잠을 잔다면 세상이 얼마나 좋아지겠는가를 생각해보라. 또 어느 나라에서나 물건을 발견했던 자리에 늘 그대로 두고, 자기가 어지럽힌 것은 스스로 치운다는 것을 기본정책으로 삼는 상황도 생각해 보라.

그리고 여러분의 나이가 몇 살이든 밖에 나갈 때는 서로 손을 잡고 의지하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은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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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스러움과 서두름 속에서도 평온함을 유지하기를. 정적에 싸인 곳을 기억하기를. 가능한 한 굴복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를. 당신의 진실을 조용히 그리고 분명하게 말하기를.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심지어 아둔하고 무지한 사람들에게도 귀를 기울이기를. 그들도 그들 나름의 이야기가 있으니. 사납고 나쁜 사람들을 피하기를. 그들은 영혼을 갉아 먹으니.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비교한다면 공허해지거나 잠시 기분이 나아질 뿐. 세상에는 항상 당신보다 낫거나 못한 사람들이 있거늘. 앞일을 계획하는 것만큼 지금까지 이뤄낸 것들을 음미하길. 아무리 미천한 일이라도 그것이 당신이 할 일이라면 그 일에 흥미를 잃지 않기를. 시간에 따라 운은 변할 수 있지만 그것은 변하지 않는 당신의 천직이 될 것이니. 사업을 할 때는 조심하기를. 세상에는 사기가 판치고 있으니. 그러나 이것 때문에 좋은 일들에 대해 눈감는 일이 없기를. 많은 사람들이 높은 이상을 위해 분투하고 있고 영웅적인 노력들로 세상은 가득 차 있으니. 당신 자신이 되기를. 관심이 있는 것처럼 가장하지 말기를. 사랑에 대해 냉소적이지 말기를. 아무리 무미건조하고 정나미가 떨어지는 일들이 벌어져도 사랑이야말로 잔디처럼 연중 끊이지 않는 것이니. 젊음의 것들을 우아하게 단념하면서 세월의 흐름에 순응하기를. 갑작스런 재난에서도 당신을 지켜줄 영혼의 힘을 키우기를. 그러나 상상의 것으로 스스로 괴롭히지 말기를. 두려움의 대부분은 피로와 외로움에서 싹트나니. 엄격한 자기수양을 넘어서 자신에게 온화하기를. 당신은 우주의 자녀이니. 나무와 별보다 못한 존재가 아니니. 당신은 여기에 있을 권리가 있거늘. 그리고 당신이 의식하든 못하든, 우주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대로 끝없이 펼쳐지고 있으니. 그러므로 신과 융화하길. 신이 당신에게 어떤 모습이든 간에. 그리고 삶의 시끄러운 혼란 속에서 당신이 무엇을 열망하고 무엇을 위해 다투고 있든 간에 당신의 영혼과 조화를 이루길. 세상은 거짓과 허영과 무너진 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답거늘. 조심하기를. 행복하기 위해 분투하길.

엘리슨(현재 미국자전거횡단중인요가선생)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
http://www.hani.co.kr/
한겨레신문 연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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