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B의 탄생과 보급 1970년대 캘리포니아에서 개발되어 하이브리드형과 함께 21세기형 탈것으로 월간 바이시클라이프(2003년 3월호)
게리 피셔를 비롯한 젊은이들이 1970년대에 캘리포니아 산속을 달리면서 개발한
마운틴바이크(MTB)는 자전거 세계를 크게 바꿔 놓았다. MTB는 이어서 하이브리드형까지 나오게 해서 자전거를 튼튼하면서 타기
편한 것으로 만들었다. 산길과 비포장도로까지 활동범위를 넓힌 MTB와 하이브리드형은 자전거의 실용성을 크게 높이며 21세기형
탈것으로 떠오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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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100년 동안의 자전거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은 마운틴바이크(MTB)의 등장이다. 1970년대 중반 원형이 나타나
80년대에 MTB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은 새 탈것은 편리한 하이브리드형도 탄생시켜, 자전거가 90년대에 큰 붐을 이루며
21세기형 탈것으로 떠오르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20세기 들어와 자전거는 크게 보급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가볍고 속도가 빠른 로드형과 실용자전거로, 모두 포장도로를 달리는 데
어울리게 만들어졌다. 새로운 MTB의 등장으로 자전거는 산길과 비포장도로까지 달리면서 활용범위를 넓혀주었다.
‘MTB의 아버지’ 게리 피셔와 요람 탬산
MTB는 자전거를 더욱 쓸모 있고 사랑받는 탈것으로 만들었다. 미국에서 탄생한 MTB 개발에서 결정적인 구실을 한 이가
‘MTB의 아버지’라 불리는 게리 피셔(Gary Fisher)이고, 요람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북쪽에 자리한 마린카운티의
탬산(Mt. Tam)이다.
샌프란시스코 금문교를 지나 도심에서 20km 떨어진 곳에 있는 탬산(공식이름은 Mt. Tamalpais)은 784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경치가 좋아 많은 등산객이 찾는 명소다. 1960년대 말, 소방관들이 다니는 산속 길을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색다른
자전거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협곡일당(canyongang)이라 불리는 이들은 1930년대에 처음 대형 타이어를 달고 튼튼한
구조로 나와 사랑받았던 스윈 엑셀시오를 조금 손본 뒤 험하게 산길을 내달렸다(협곡 일당에 관해서는 본지 2002년 12월호에
실린 게리 피셔 칼럼 ‘MTB 발상지 마린카운티의 라이더 vs 등산객’을, 탬산의 현재상황은 2003년 10월호의 ‘MTB
탄생지 탬산을 가다’를 참조). 이들은 탬산 꼭대기에서 계곡까지 자전거로 레이스를 즐겼고, 오를 수 있는 길은 어디든 다
다녔다. 게리 피셔는 70년대에 이들에 합류했다. 이 무렵 조금 손을 본 자전거는 클렁커(klunker, 또는 clunker)라
불렸다.
1950년 마린카운티에서 태어난 피셔는 12세에 자전거 레이스를 시작했고 14세 때는 경기시즌이 끝난 뒤 험로를 달리는
사이클로크로스 레이스에도 출전했다. 68년 18세이던 그는 장발 때문에 레이스 출전을 거부당하기도 했다(68년 해제). 그는
로드와 트랙 레이스에서 좋은 성적을 올려 한때 미국 올림픽팀 후보선수로 꼽혔다.
게리 피셔와 친구들의 탬산 라이딩에서 가장 이름난 것이 산길을 빠른 속도로 내려가는 ‘다운힐’이었다. 변속기가 없고 브레이크도
페달을 거꾸로 밟아 감속하는 코스터형이어서 초기 클렁커들은 쉽게 망가졌다. 특히 브레이크가 과열되어 레이스가 끝나면 그리스를
‘다시 칠해야(repack)’ 해서 다운힐 대신 ‘리팩 레이스(Repack race)’라 불렸다. 피셔는 이 레이스를 위해
1974년 튼튼한 프레임을 쓰면서 뒷바퀴에 5단 변속기와 대형 브레이크를 갖춘 클렁커를 만들었다. MTB의 원형이 된 피셔의 새
자전거는 인기를 모았다.
탬산에서 젊은 라이더들이 벌이던 리팩 레이스가 공식으로 열린 것은 1976년 10월이었다. 탬산 속 파인산(537m)의 산길에서
표고차 400m, 길이 3.4km 코스를 다운힐하는 경기였다. 이 레이스는 71년부터 피셔의 룸메이트로 뒤에 피셔와 함께 MTB
제작회사를 세우는 찰리 켈리가 마련했다. 피셔보다 5세 위인 켈리는 몸무게가 91kg을 넘어 자전거 달리기도 했지만 레이스 주관
등에 큰 열의를 보였다. 1회 때는 7명이, 1주일 뒤에 열린 2회에는 9명이 출전했다. 이 해에는 9회, 77년에는 8회,
78년 3회, 79년 2회가 열렸고 MTB가 제대로 나오던 83년과 84년에는 각 1회로 위험한 리팩 레이스는 막을 내렸다.
1회 대회에는 출전하지 않았던 피셔는 그 뒤 모두 4회 우승했다. 그는 77년에 열린 레이스에서 4분22초의 코스기록으로
우승했다. 평균시속 46.7km의 스피드로, 이 기록은 그 뒤에도 깨지지 않았다. 2위 기록은 2초 뒤진 조 브리즈였고, 그는
10회 우승했다.
레이스 때마다 클렁커의 말썽으로 중도탈락하는 이가 많았다. 리팩 레이스에서는 라이더의 달리는 솜씨가 승패를 갈랐고 프레임,
변속기, 브레이크와 그 조작방법, 핸들 등에서 누군가가 조금 새로운 것을 쓰면 모두 다투어 모방했다. 리팩 레이스는 MTB를
위한 또 하나의 요람이었다. 이 레이스가 없었으면 MTB는 다른 모양이 될 수 있었고, 또 공식 등장이나 보급시기도 훨씬 뒤졌을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74년의 리팩 레이스용 자전거에 이어 피셔는 75년 개량형을 만들고 다음해에는 판매용 클렁커를 꾸몄다. 이들 모델의 바퀴는
26×2.125인치로 뒤에 MTB의 업계 표준이 되었다. 그뒤 피셔와 켈리는 조 브리즈와 톰 리치 등 뛰어난 레이서인 젊은
프레임 제작자에게도 프레임을 부탁해서 클렁커를 만들어, 일부는 팔고 하나둘 자신이 타기도 했다. 마린카운티에서 젊은이들이 만든
클렁커는 76년 20~100대, 77년과 78년은 각각 100대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모두 스윈 자전거를 개조하거나 요즘
MTB와 비슷한 새로운 프레임으로 꾸민 것들이다.
1979년 마운틴바이크사에서 판매 시작
튼튼한 프레임, 다단 변속기, 말 잘 듣는 강력한 브레이크, 직선형에 가까운 핸들, 대형 타이어로 꾸며진 클렁커들이 인기를 얻자
피셔와 켈리는 1979년 마운틴바이크(MountainBike)사를 세워 신형 자전거를 팔기 시작했다. 이 때가 공식적으로는 처음
MTB가 등장한 것으로, 첫해에 160대, 80년에는 1천대가 팔렸다. 미국에서 MTB 판매는 79년 200대, 80년
300대, 81년 2천대였고 82년에는 대량생산된 모델이 등장해 5천대로 늘어난 뒤 83년에는 5만대로 급증했다.
산악자전거를 뜻하는 마운틴바이크라는 말은 1869년 독일의 한 잡지가 커다란 기구의 도움을 받으면서 산길을 오르는 자전거 그림을
싣고 Gebirgevelocipede(mountain bike)라고 설명한 데서 비롯되었다. 1970년대 중반 캘리포니아에서
클렁커를 타던 히피가 마운틴바이크라 불렀고, 이 말을 들은 어느 영업사원이 78년 찰리 켈리에게 제품에 이 이름을 쓰라고 해서
켈리와 피셔는 다음해 회사를 세우면서 MountainBike라 이름지었다.
켈리는 1980년 변호사를 통해 마운틴바이크를 상표로 등록하기로 했다. 심사관은 이 탈것이 “산에서만 타는 것인가?”하고 물어 변호사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아 상표등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저전거 전문지 ‘Bicycling’은 마운틴바이크가 알맞은 이름이 아니라면서 새 이름을 공모했다. 이때 생긴 것이 ATB(All
Terrain Bicycle)로, 이 월간지는 ATB를 고집하여 3~4년 동안 혼란이 왔으나 애호가들은 MTB쪽을 좋아해서
일반화되었다.
MTB의 초기 바람에 재빠른 반응을 보인 업체는 일본의 시마노다. 1981년 샌프란시스코 근방에서 이상한 자전거들이 무리지어
달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미국시장 담당이던 현 회장 시마노 요시조는 현지를 찾아, 산길을 즐겁게 내달리는 젊은이들이 “자주
말썽 나서 야단이다. 튼튼한 부품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 MTB의 앞날을 내다보았다. 그는 힘들게 본사측을 설득하여
부품 개발에 착수해서 82년 전용부품인 데오레 XT를 내놓았다. 유럽의 이름난 메이커들이 MTB 바람을 ‘한때’의 유행으로 여겨
외면했던 것도 시마노가 MTB 부품업계에서 독주하는 요인이 되었다. 로드형에서도 유명부품을 섞어 쓰는 일이 있었으나 MTB 등장
뒤 성능과 품질을 인정받은 부품을 모아 완성차를 내놓는 일이 상식이 되었다.
게리 피셔를 비롯한 여러 명의 클렁커 라이더들의 힘으로 완성된 MTB는 80년대에 미국에서 시민권을 얻고 세계적으로 번져갔다.
미국에서는 83년 전체 자전거 판매량의 5%뿐이던 MTB가 93년에는 95%로 늘어났다. 여기에는 튼튼하고 자세도 편한 MTB와
가볍고 경쾌하게 달리는 로드형의 장점을 절충한 하이브리드형이 90년대에 큰 인기를 얻은 것도 큰 힘이 되었다.
83년에는 미국오프로드자전거협회(NORBA)가 발족되고 뒤이어 국제산악자전거협회(IMBA)도 태어났다. MTB는 1990년
국제자전거연맹이 공식 인정해서 첫 MTB 세계선수권경기도 열렸다. 세계적인 열기로 96년 애틀란타올림픽 때 MTB는 시범종목이
된 뒤, 2000년에 열린 시드니올림픽에서는 공식종목으로 경기가 진행되었다.
MTB와 이어서 등장한 하이브리드형은 자전거를 더욱 편리하고 실용성 높은 탈것으로 떠올렸다. 이들이 90년대의 새로운 자전거
바람의 바탕이 되었고, 이 바람은 연료가 필요 없고 공해도 없는 교통수단인 자전거를 건강과도 결부시켜 21세기형 탈것이 되게
했다.
이같은 MTB의 밝은 앞날을 바라보면서 MTB 개발과 완성에서 주역으로 활동한 일꾼들은 모두 자전거에 연관된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있다. 이제 53세가 된 1등공신 게리 피셔는 ‘게리 피셔 바이시클’을 운영하면서 레이싱팀을 갖고 스스로도 힘든 레이스에
직접 뛰어들고 있다. 리팩 레이스의 주역 찰리 켈리는 필자로 크게 이름을 떨치고 있고, 조 브리즈는 ‘브리즈 바이시클’의
사장이다. 뛰어난 프레임 제작으로 크게 공헌한 톰 리치도 ‘리치 디자인회사’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Gary Fisher and Clark Natwick challenging Golden Gate Park’s log barricades in this December, 1975 event, just a week before the 1st ever US CycloCross Championships in Berkeley’sTilden Park. Photo by: Ray Stafford
5월14일 2시에 단골가게인 부산대학앞 자이언트 대리점에 바로 그(!) 게리 피셔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원래 일정은 서울과 대구만 가는것이었는데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회먹으러 부산까지 왔다고 한다. 1시 좀 넘어서부터 가서 소일거리러 한자를 외우며 기다렸지만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는 게리피셔. 좀 늦어진단다. 세시가 되어도 오지 않아서 가게앞에서 부자모 사람들과 분명 자전거를 타고 오느라 늦는거라는등 영양가없는 농담을 하고 있는데 다가오는 검은 밴! 그분이 오셨다!!!
차에서 내린 그에게 "굿 애프터 눈~"하고 인사를 건네고 악수를 했는데 참 크고 따뜻하더라- 홍보가 덜 되어서 10명 내외의 조촐한 인원이 그를 기다렸다. 가게 안으로 가서 기념 촬영도 하고 티셔츠에 사인도 받았다. 뭔가 말을 더 건네보고 싶었는데 뻘쭘한 분위기를 깰 수가 없었다. 그를 계속 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설레여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사람은 어째 또 산에서 자전거를 탈 생각을 다 했을꼬.. 자전거에 사인을 받았다. 그의 이름이 붙은 메이커의 자전거는 아니지만 산에서 달릴수 있는것이라면 다 그의 자식이 아닐까.